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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플마 Jun 13. 2022

아내는 자기를 추앙하라 한다. 하지만 난

부부 싸움을 예방하는 나만의 비책

"여보, 자기는 나를 추앙해야 해. 빨리 추앙한다고 해봐."

"???"


느닷없이 나타나 뜬금없는 말을 던진 후 아내는 저리로 도망쳐간다. 아마도 멋쩍었는가 보다. 난 잠시 어리둥절했었으나 아내의 말이 무엇인지를 금세 알아차렸다. 근래 브런치에 '추앙' 관련 글들이 워낙 많이 등장했었기에 난 그것이 어떤 드라마의 대사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아내는 방금 전까지 그 드라마를 보고 있었던 바 잠시 그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었나 보.

'추앙'이란 단어의 뜻은 알고 있지만 정확하게 확인하고자 사전을 찾아보니, '높이 받들어 우러러 봄'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추앙이란 것은 예전 한동안 내가 아내에게 시도해봤던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러한 시도 결과 깨달은 것은, 추앙은 결혼 생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으며 오히려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내의 요구는 들어줄 필요가 없는 소원인 것이다. 드라마의 어떤 상황에서 추앙이란 대사가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생각에 추앙이란 것은 연애할 때나 잠시 생길 수 있는 감정일 듯하다.


이제 이 글의 주제이다. 난 왜 아내를 추앙해보려는 시도를 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일전에 난 '허당 고수 위에는 진짜 고수가 있었다'라는 글에서 부부 싸움을 소재로 내 삶의 일면을 살짝 보여준 바 있다. 여기에서 난 이런 문장을 썼었다.

'부부싸움이란 것은 모든 부부에게 삶의 한 부분이 될 수밖에 없으며, 어쩌면 이것은 함께 살아가는 내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다. 부부싸움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부부만 봐도 그렇다. 우리 부부는 현재 상당히 평온한 상태로 잘 지내고 있다. 아내가 내게 꼬투리를 잡자하면 많은 싸움거리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냥 평온한 상태이다. 그리고 이 평온한 상태라는 것은, 우리 부부에게는 심각한 부부싸움 거리가 없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싸울 일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부부 사이에서는 아주 작은 다툼이 가끔씩 발생하였다. 이러한 다툼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등장하곤 했다. 심하게 다투는 것은 아닐지라도 여하튼 싸움은 싸움이다. 크든 작든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그것 자체가 상당히 찝찝하다. 기분이 좋아야 할 상황이었는데 오히려 기분이 나빠져 버렸으니 짜증도 난다. 토라져버린 아내를 보면 미안하기도 하다. 내가 말 한마디만 참으면 되었던 것인데, 난 그 순간 왜 그 말을 참지 못했을까?

아내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내가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는 서로가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나 자신의 행복보다는 상대의 행복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다툼은 일어난다. 다툼은 보통 아내로부터 시작된다. 아내는 절대로 이 말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아내는 자신의 컨디션과 감정 상태가 말에 그대로 묻어 나온다. 상태가 안 좋을 때는 말에 짜증이 잔뜩 섞여 있다. 물론 그 짜증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문제는 나도 상태가 안 좋을 때 일어난다. 아내의 짜증이 내 신경에 거슬리면,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욱하며 아내에게 짜증을 내버리는 것이다. 정말 순간적이다. 내가 아차 하고 후회하며 아내에게 변명을 해보지만 이때는 이미 상황이 악화되어버린 상태이다. 아내는 나로부터 그런 대우를 받았다는 것만으로 큰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아내와 다툰 후 곧바로 화해한다 하더라도 내 마음은 편치 못했다. 아내에게 상처를 줬다는 미안함 때문이다. 나는 그냥 아내의 말들에 'Yes. Yes. Yes. 당신이 옳아.'만 하며 아내 편을 들어주기만 하면 되었을 상황이었다. 아내의 말을 논리적으로 따져보며 잘잘못을 판가름할 필요가 없던 거였다.

'이런 것을 잘 알고 있는 내가 왜 자꾸만 실수를 되풀이할까?'

난 이것이 궁금했고 또 이러한 실수를 예방할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찾아낸 방법이 '아내에의 추앙'이었다. 난 아내와의 (아주 짧았던) 연애 시절을 되새겨 봤다. 그때 그 시절 나에게, 아내라는 사람은 단순한 추앙 정도로 끝낼 사람이 아니었다. 이 세상 전부였었다. 아내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쩌면 난 지금도 싱글로 살고 있을 것이고, 지금 내가 누리는 가족의 행복이라는 것을 영원히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착하고 이렇게 예쁘고 이렇게 똑똑사람이 이렇게 못난 나와 과연 결혼할 생각이 있을까?'

옛날로 돌아가 잠시 이런 생각을 해본다. 그러면서 만약 지금이 그때 그 상황이었다면, 아내의 말에 내가 감히 짜증이란 것을 낼 수 있었을까? 절대로 아니었을 것이다. 아내가 어떤 말을 하든 어떤 심술을 부리든 난 모두 받아들였을 것이다.


난 이제 해답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부부싸움을 피할 수 있는 해법을. 아내를 추앙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순간부터 난 연애 시절의 감정으로 되돌아가려 애썼다. 아내가 어떤 부탁을 하든 어떤 짜증을 내든 다 받아들이기로. 과연 나는 이 방법으로 부부싸움을 피할 수 있었을까?

내 대답은 'Absolutely no!'이다.

일단 연애 감정이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자꾸만 까먹는 것이 첫째 이유이다. 그리고 함께 오랫동안 살다 보니, 아내는 내가 우러러보는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그냥 함께 있는 자체로 편한 사람이다. 그런 것을 억지로 추앙해보려 하니 불편한 감정만 생긴다. 또한 순간적으로 말다툼이 일어나는 상황에서는 추앙의 감정을 만들어낼 틈도 없다. 결론적으로, 아내를 추앙하는 방법으로는 부부싸움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실패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난 어떻게든 부부싸움을 피해 가고 싶은데, 그러려면 아내의 짜증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했다.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아내가 짜증을 달고 사는 사람은 아니며 어쩌다 한번 있을 뿐이다. 그것도 약간의 넋두리성으로 하는 정도이다.) 도대체 그런 방법이 없단 말인가? 이에 대해서 고민을 하던 중 우연히 아들과의 대화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아들은 워낙 말수가 적어 우리와는 대화를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런 아들이기에 어쩌다 나에게 말을 걸어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어떻게든 그 대화를 조금이라도 더 끌고 가고 싶어 한다. 아들이 말을 걸어오는 상황은 대부분 내게 어떤 부탁을 할 때인데, 난 아들이 아무리 무리한 부탁을 하더라도 전혀 짜증 내지 않고 거의 1+1 써비스 정신으로 다 들어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난 아들을 대할 때 항상 '돌봄 정신'으로 대해 왔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아들에게는 짜증을 내지 않았고 말 한마디에도 사랑을 듬뿍 담으려 애써왔었다. 바로 여기에 해답이 있었다. 내가 아내를 대함에 있어서 필요했던 것은, '추앙'이 아니라 바로 '돌봄 정신'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내가 말다툼 뒤에 꼭 덧붙이는 말이 있었다.

'도대체 당신은 내 편이야, 남 편이야?'

예를 들어, 아내가 직장에서의 어떤 갈등 문제를 얘기했을 때 난 무조건적으로 아내 편을 들지는 않았었다. 그 이유는 아내가 그 문제로 너무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상대편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을 것이므로 당신이 마음을 풀고 그냥 편하게 대해줘. 앞으로 계속 봐야 할 사람인데 괜히 그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당신만 손해잖아?'

라고 설명하곤 했었다. 그런데 사실 아내가 내게 바랐던 것은 그런 훈계조의 해설이 아니라, 울적해진 자신의 마음을 다독여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내 대답은 번지수가 한참 잘못된 것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내가 이 세상에서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나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아내가 아무리 경제력이 좋고 똑똑하고 강하다 하더라도, 아내 혼자 사는 세상에서는 우리가 부부이기 때문에 느낄  수는 만큼의 재미와 행복감은 없을 것이다. 서로 의지하고 삶을 공유하며 기쁨은 배가시키고 슬픔은 나눠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삶이 더욱 풍요롭다는 것을 우리 부부는 잘 알고 있다.

아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란, 달리 말하면 아내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난 이 깨달음을 바탕으로 아내를 철저한 '돌봄 정신'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모든 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내가 짜증을 내면, '오늘 직장에서 힘들었었나 보다. 아내가 나 말고 누구에게 스트레스를 풀 수 있겠어? 나라도 있으니 다행이지.'라고 생각하며 전적으로 아내의 편에 서서 마음이 편해질 수 있는 말들을 해주었다. 아내가 내 실수들을 들춰내 약올리는 말을 하면, '아내는 그것이 나름대로의 유머라고 생각하는가 보다. 하긴 내 행동이 좀 바보 같기는 했지.'라고 생각하며 함께 맞장구를 치며 웃어 주었다. 아내가 어떤 말을 해도 내게 짜증이 발생하는 일은 없어져 버렸다.


이제 내 고민은 해결되었다. 사실 아내는 내게 너무도 고마운 사람이다. 나와 내 주변의 모든 가족들이 모두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항상 마음을 써준다. 덕분에 어머니도 마음 편하게 사시고, 내 아우, 누이들도 모두 편안하다. 온 집안이 다 편안하다. 이런 아내에게 가끔가다 통제할 수 없는 짜증을 내고 또 곧바로 후회하는 일의 반복이 내게는 너무도 큰 고민거리였었다. 이제 '아내에의 돌봄 정신'으로 그 고민을 해결했기에 난 너무도 기쁘다. 아내는 겉으로는 강한 여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나약하기 그지없어 내 돌봄이 꼭 필요했던 여자였던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아내에게 슬쩍 물어봤다. (아내는 이 글의 존재를 모른다.)

'여보, 나보고 추앙하라고 했잖아. 어떻게 추앙해주면 좋겠어?'

'아니, 당신의 추앙은 필요 없어. 난 내가 나 자신을 스스로 추앙하기로 했거든. 이 세상에 믿을 사람은 나뿐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아. 난 나 자신만 믿으며 살기로 했어.'

아마도 예전의 내 짜증들 때문에 날 못 믿겠다는 심중을 넌지시 돌려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도 다행이다. 늦게나마 내가 정신을 차렸으니.


(2022년 6월 12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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