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과 들뜸이 사라진 사람

이 악물고 세상 탓하기

by 손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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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2년쯤 됐다. 설렘과 들뜬다는 느낌을 잊은 것 같다고 깨달은지. 깨달은 게 2년쯤 된 거니까 못 느끼게 된 건 좀 더 오래 됐겠다. 설렘에 무뎌진 시점과 그걸 깨달은 시점이 엇비슷할 법도 한 게, 그 해 6월 쯤 또 팝업 식당 이벤트를 했었다. 그때가 제법 즐거웠었던 기억으로 남은 걸 보면 그때까진 세상이 즐거웠던 것 같다. 아 그리고 8월 31일에는 천문대에서 해리에게 중요한 선물을 주기도 했다. 그렇게 따져보면 들뜨지 않게 된 건 30살 가을 때부터였겠다.


나한테 있어 연중 가장 기대되는 순간을 꼽으라면 항상 생일과 크리스마스였다. 생일은 내가 주인공이 된 기분이라서, 크리스마스는 세상 모두가 다같이 한 마음으로 즐기는 분위기라는 게 좋아서 기대됐었다. 두 날짜에는 혼자서 많은 의미를 부여했었다. 누군가 축하해주겠지, 누군가 같이 즐거운 기분을 내주겠지 같은. 또 내 주변 사람들도 비슷한 수준으로 기대하기를 뻔뻔하게 바라기도 했다. ('아무래도 다 함께 즐겨야만 잘 보냈다고 할 수 있지!' 라는 오만한 생각을 했던 나를 되돌아보면 참 대단하게도 염치 없는 사람이었구나 싶다.) 그러다 20대 후반에 접어드니 생일에 먼저 무감각해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턴 매년 기대감이랄 것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아 뭔가 작년엔 이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싶을 정도로 나 마저도 기대감이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정확히는 의미를 부여하는 일에 흥미를 잃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그 여파는 마치 전염병이 돌듯 크리스마스에까지 번졌고, 2023년의 12월은 처음으로 호들갑 없는 연말이 됐다.


의미를 부여하는 일에 흥미를 잃는 것은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 아니다. 시간이 다 지난 지금에야 알았지만, 부작용이 좀 있었다. 일상에서 의미가 사라지니 낭만이 제일 먼저 자취를 감췄다. 내 감상이 단조로워지자 일상 자체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럴만도 한게 조명하는 일이 없어지니 매일이 똑같아질 수 밖에 없다. 가뜩이나 뻔하고 평범한 것에 질색팔색하는 내가 애써 치켜세우는 것마저 그만두니, 그런 일상이 내 정신을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그렇게 별 거 없는 일상에 남는 건 냉소적인 나 뿐이었다. 시큰둥, 시큰둥, 시큰둥한 채로 보내는 1년은 늘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었다. 딴에 발버둥 치듯 팝업 식당도 열고, 난생 처음 엽서도 만들어봤다. 그런데도 평상시엔 '너무 지루하다'는 문장은 입에 달고 살았다. 어쩌면 이 프로젝트가 있었기 때문에 나머지 일상이 더 초라해졌나싶기도 하다. 결국 나는 매일같이 늘 더 큰 의미를 찾아 헤맸다. 그렇게 2023년을 흘려보냈다.


그러다 가을쯤, 냉소적인 태도를 고치고 싶어졌다. 어떤 대단한 계기가 있던 것도 아니고 정말 문득 변했다. 많은 사람들이 평온해하고 행복해하는 그 일상에 나만 불만족해하는 건 세상 탓이 아니라 내 탓이겠구나 싶어서였다. (고백하자면, 한때는 다른 세상 사람들은 이 지루한 일상을 대체 어떻게 견디냐며 부끄러운 선민의식을 가진 적도 있다.) 먼저 이 냉소적인 태도부터 뜯어고치고 나면 시큰둥한 마음을 고치고, 그 다음엔 단조롭던 일상에 다시 의미를 찾고 싶어졌다. 들떴을 때의 그 두근거림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2024년을 앞두고서 큰 맘 먹고 새해 다짐도 세웠다.(꼴에 참 대단한 일도 했다) 물론 다 지키진 못했다. 기어코 외면했던 분야도 공부하다 말았고, 매사에 친절하지도 못했고, 결혼식 빼면 재밌는 아이디어의 스케일을 키우기는 커녕 시도도 못했다. 그래도 나름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책도 좀 읽은 것 같지만, 감상과 느낌을 공유하는 데에는 무참히 실패했다. 오히려 세상을 향한 염세적인 마음만 응어리처럼 딱딱하게 맺혔었다. 이건 내가 매사에 친절하지 못했던 것과도 맥을 같이 하는데, 사실 갈수록 천박해지는 세상과 무지랭이 같은 사람들 때문에 조금 지쳤었다. 아무리 내가 기를 쓰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도,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들을 별로 만나질 못했다. 때로는 하임이 대신 저 사람이 갔어야하는데 싶을 정도로 미운 사람들도 있었다. 의미 부여 되찾기 프로젝트의 1단계인 냉소적인 태도 고치기부터 나한테 너무 높은 허들이었다. 그렇게 2024년은 멍청하다고 혼자만 여기는 세상을 향해 쉐도우복싱을 하면서 보냈다.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다. 또다시 31살의 생일은 심심했고, 크리스마스는 기다려지지 않았다. 해가 바뀌고 난 뒤에야 뭐가 문젠지 알았다.


문제는 자기확신이었던 것 같다. 왜 항상 내가 생각하는 것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틀렸다고 믿었을까? 여전히 세상이 천박하긴 해도, 미운 것도 고운 것도 많은 게 세상인데. 눈에 뭘 담을지는 내가 결정하는 건데 왜 기어코 천박한 것만 눈에 담으려 했을까. 세상을 향해 세상이 천박하다는 것을 주장해서 무얼 하고 싶었던 걸까. 사실 하고 싶었던 건 하나다. 세상이 자정작용을 해주었으면 했다. 얼마나 비인간적인지, 얼마나 비합리적인지 깨닫고 다시 깨끗해지길 바랐다. 그게 너무 큰 기대감이었다는 걸 2025년에서야 깨달았다.


여전히 세상은 마음에 안든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처음 생각했던 그때보다도 더 마음에 안든다. 그치만 내가 나를 너무 크게 보기를 멈춰야겠다. 지금까진 잘못된 곳을 가리키며 '저게 바뀌기 전엔 꿈쩍도 하지 않겠다!' 라고 외치던 나였다면, '으휴 멍청이들 으휴 진짜 으휴' 하면서 나는 나의 방향을 다시 되찾기로 했다. 그래서 세상과의 연결을 좀 끊기로 했다. 한때는 SNS와 뉴스를 통해 세상과 연결되는 게 나의 예민한 감각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세상과 연결되니까 빌어먹을 알고리즘 때문에 지저분한 세상만 더 많이 봤다. 그래서 나를 갉아먹는 연결을 멈추고, 세상에 있는 고운 것들을 담아보기로 했다. 책과 영화를 더 많이 보는 것도, 난생 처음 필사를 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친구들에게 엽서를 보내기로 한 것도 같은 이유다. 인스타와 유튜브를 지우기로 한 것도 같은 이유다. 탁한 물을 정화하기 위해서 흙먼지를 덜어내기보다, 깨끗한 물을 더 많이 집어넣는 그런 결정이다. 그렇게 세상에 고운 것들을 더 접하고서 세상이 예뻐보이면, 그땐 약간은 덜 염세적인 내가 될지도 모르겠다.


낭만이 있던 20대의 기억은 진짜 찬란했다. 재밌어보이는 것은 재밌다는 이유만으로 실행했고, 시간을 더 즐겁게 보낼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도 계속 꺼내보고 싶은 기억이 됐다. 만약에, 진짜 만약에 다시금 세상엔 고운 것이 더 많다고 느끼게 되면, 어쩌면 또 꺼내보고 싶은 시간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문득 비실거리긴 하지만 기대감이 생긴다. 비록 비실거리는 기대더라도 왠지 더 키워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2025년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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