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관에 빠져있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에요(positive)
지금 내 상태를 묘사하기에 '노잼시기'라는 표현이 알맞을지는 잘 모르겠다. 뭐랄까 '노긍정시기 탈출기' 정도가 조금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세상이 지루하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을 좋게 봐줄 건덕지가 없어서 의욕이 한 풀 꺾인 느낌이다. 또 일에 몰입을 못하고 있는 것도 노긍정시기에 한 몫하고 있다. 한두 달 전의 나였다면 이런 나를 그대로 놔뒀을텐데, 그새 정신이 좀 자라버린 터라 이런 나를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다. 그래서 요새 노긍정시기 탈출을 위한 일련의 노력들을 하고 있는데, 조금씩 효과가 보인다.
제일 먼저 시작한 건 필사다. 32살 먹고 필사라는 것을 처음해봤다. 교보문고를 구경하다가 발견한 필사책을 보니 불쑥 해보고 싶어졌는데, 솔직히 말하면 책 표지에 적힌 제목에 혹해버렸다. '나의 어휘력을 위한 필사 노트'라니. 쇼츠와 릴스에 빠져지내는 동안 내 시간만이 아니라 한때 풍부'했던' 문장력마저도 잃어버렸던 참이었다. 그치만 굳이 필사일 필요는 없지 않나라며 더 많은 책을 읽겠다는 다짐으로 대신 하면서 교보문고를 떠났다. 그리고 한 달 동안 책을 제대로 읽지 않는 나를 마주했고, 그 즉시 필사책을 주문했다. 필사를 위한 습관은 작은 것부터 들이기로 했다. 다행히(?) 책이 하루 한 문장을 받아적는 방식으로 구성되어있어서 시작이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한 문장만으로 끝내기 아쉬워서 5~6일치를 앉은 자리에서 다 써버리는 날도 있었다. 작가님이 엄선한 작품과 문장들을 읽고 쓰면서 마음에 드는 작품은 따로 표시해두기도 하고, 같은 문장을 두세 번씩 쓰기도 하니까 '필사'의 범위가 점점 넓어지는 중이다. 필사를 시작하고 생긴 좋은 점을 꼽자면, '세상을 좋게 바라봐도 괜찮을 이유'들을 몇 개 찾았다는 것이다. SNS나 뉴스를 보다보면 미워할 거리 천지지만, 엄선된 문장과 작품은 시간이 인정할만큼 훌륭한 것들이기 때문에 필사를 하다보면 나의 소중한 시간을 훌륭한 것들과 함께하는 데에 쓸 수 있다. 내가 몰랐던 아름다운 문장들을 발견할 때 제법 기분이 좋다. 예전이라면 혼란한 세상을 접했을 시간이지만, 가치 있는 것들을 발견하는 시간으로 탈바꿈하기를 참 잘한 것 같다.
두번째로 시작한 것은 애니메이션 소비하기다. 노긍정시기를 타파하기 위한 해법치고는 상당히 뜬금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애니메이션 콘텐츠들을 소비하면서, 무려 낭만을 되찾고 있다. 서른살 무렵부터 잃어버린 낭만을 슬램덩크와 하이큐에서 되찾았다. 예전 같으면 아득한 분량의 콘텐츠들은 시작도 안했을텐데, 남에게 추천할만큼 누군가에게 가치있던 작품들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미루지 말아보기로 결정했다. 나름 콘텐츠 인풋 기간이라면서 남들의 추천을 찍먹해보기로 했는데, 돌이켜보니 이 콘텐츠 인풋 기간을 가지길 백 번 잘했다. 그 덕분에 공감할 게 더 많아진 세상을 살아가게 됐다. 고죠 사토루가 왜 안대를 써야만 하는지, 이샤가 징크스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탄지로가 해의 호흡과 물의 호흡을 동시에 하는 게 얼마나 사기인지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생겼다. 히나타의 경기를 보면서 일본의 인터하이 경기를 직관하겠다는 꿈도 생겼다. 프로 리그와 달리 3년이라는 한정된 시간동안 최선을 다해야하만 하는 카라스노 고교와 북산고 경기를 보면서 고등학교 리그에서만 찾을 수 있는 낭만을 발견하게 됐다. 남들에게 더 많은 콘텐츠를 추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됐다. 내가 애정하는 콘텐츠와 캐릭터를 남들에게 영업해야겠다는 일념이 생기니 그 시간만큼은 어느 순간보다도 열정적으로 몰입하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을 소비하면서 몰입과 낭만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시작한 것은 사색하기다. '너는 생각이 많아서 피곤한 것'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나도 생각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푸념하기 일쑤였다. 그치만 생각을 안하기가 도저히 불가능하다. 진짜 더 속내를 털어놓자면, '어떻게 이런 생각들을 하지 않고 살 수 있지...?' 가 나의 본심에 가깝다. 해결되지 않은 거시적인 문제들이 있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아직 찾지를 못했는데 어떻게 생각을 안할 수 있나 싶다. 임시현 선수(여자 양궁 선수다)가 인스타에서 '사색이 자본이다' 라는 책을 추천하길래 또 아묻따 중고 책을 하나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나도 제대로 꼬일대로 꼬인 사람인 게 자기계발서를 읽을 때마다 '저 사람은 어떤 대단하신 양반이시길래 또 멋들어지는 말씀을 하겠다고 책씩이나 쓰셨나몰라' 라는 틀려먹은 생각을 하곤 했다. 그래도 이 책을 읽을 때만큼은 '내가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니까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들어나 보자'라는 마인드로 시작했다. 읽기 시작한 이래로 제법 곱씹어볼만한 문장을 많이 발견했다. 사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다림이라던지, 내가 아닌 남을 위한 삶을 살 때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던지. 지금 갈팡질팡하고 있는 내가 방향을 정할 때 좀 갈피를 잡을만한 문장들을 밑줄 치면서 읽고 있는데, 사색의 가치를 알아주는 책이 있는 것 같아서 더 진지하게 읽게 된다. (내 입장과 배치되는 책이었다면 또 배배 꼬인 심보로 읽었을지도 모르는데, 내 입맛에 맞는 책만 읽고 있다는 반성도 같이 하고있다.) 덕분에 지금 나의 상황에 어떤 고민들을 더 해야하는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아직 반의 반도 못 읽었지만, 덕분에 노긍정시기를 탈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발견했다.
몇 년째 이어지는 이 노긍정시기가 언제 끝날지는 전혀 모르겠다. 끝이 날지 안날지도 모를 일이다. 어차피 세상에 미운 것은 없어지지 않을테니까, 세상을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봐도 맞는 선택 같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진행형인 이 해법들과, 곧 또 불쑥 찾아올 어떤 아이디어들이 낳을 결과물들이 궁금하긴 하다. 또 이 해법에 기대를 걸고 있는 나를 스스로도 응원하고 싶어지기도 했다. 되찾은 낭만과 몰입감, 그리고 계속 발견하고 있는 세상의 아름다움들을 잃기 전에 더 많이 세상과 나누는 일도 슬슬 시작해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