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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 Feb 20. 2023

나에게 이런 면이?

사춘기의 시작

사춘기 아들과 함께 할 때면 내 안에 이런 면이 있나 놀라곤 한다. 정확히 두 번 놀란다. 사춘기 아들이 정의하는 내 모습에 놀라고, 그 말을 듣고 반응하는 내 모습에 놀란다.


뭐든지 맘대로 하는 엄마.
잘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
허술한 엄마.
올드한 엄마.
아들을 믿지 못하는 엄마.
아이 하나 제대로 못 키우는 엄마.
아는 게 없는 엄마.
등등


너무나 많다. 많은 것 중에 좋은 건 하나도 없다. 매일매일 내가 몰랐던 내 모습이 아들의 입에서 나온다. 오늘도 내일도 또또 나올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아이의 우주였는데, 사춘기 아들에게 엄마는 옆집 엄마보다 못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런 말을 들으면 솔직히 상처를 받는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내심 서운한 티를 팍팍 낸다. 아.. 오늘도 작아졌구나, 작아지고 또 작아졌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주르륵 흐를 때도 있다. 아들에게 그런 엄마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하지는 못한다. 아들이 내 말이나 행동을 보고 하는 말이니, 그런 모습이 내 안에 전혀 없다는 말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이가 말하는 내 모습이 '진정한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이렇게 단점만 두루 갖춘 사람일까? 아닐 것이다. 아이가 말하는 내 모습은 '나의 일부'라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아이는 이런 말을 나에게 할까? 마치 그 모습이 내 전부인 것처럼.


아마도 아이가 생각하는 부모의 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정말 완벽한 모습일 것이다. 아이는 그런 상을 설정해 놓은 뒤 내가 거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행동을 하면 '엄마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말을 하는 것 같다.


엄마는 편히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자기에게는 스마트폰 시간을 제한한다거나, 엄마는 고민하지 않고 시장을 보면서 자기가 사 달라고 하는 것은 조금 더 생각해 보자라고 말할 때 아이는 엄마에게 '뭐든지 맘대로 하는 엄마'라는 말을 한다.


엄마가 지금 스마트폰 보는 것은 너희들 옷 사려고 하는 거야, 엄마가 지금 시장 보는 것은 우리 가족들이 먹을 음식을 사는 거야라고 말을 해도 그건 변명처럼 들릴 뿐이다.


생각해 보면 나도 부모님께 그런 마음을 가졌던 것 같다.


부모란 언제든 내 말에 귀 기울여 주고, 공감해 주고, 위로해 주어야 한다는 부모의 상을 설정해 놓았는데, 부모님은 내가 설정한 상에 부합할 때도 있고 부합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부합할 때는 당연하다 여기고, 부합하지 못할 때는 원망의 감정을 가졌던 것 같다. '부모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 아냐?' 하는 거만한 생각만 가슴에 가득 품었던 것 같다.


이런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채 가슴속에 담아 두었더니 부모에 대한 원망은 계속 커졌다. 누구도 내가 가진 부모의 상이 잘못되었다는 말을 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부모를 이해하라, 부모에게 효도하라, 부모에게 감사를 표하라라는 말만 해 주었다.


서른이 넘어 부모님께 이해받지 못한 내 마음을 표현했더니, "너는 잘해 것은 기억하지 하고 그런 것만 기억하니."라는 말만 돌아왔다. '그랬구나, 미안하다' 한마디만 주면 되는데 부모님은 용기 내어 마음을 표현한 나를 비난했다.


사춘기 때 이런 말을 했다면 이해받을 수 있었을까? 나이 들어서 어린 시절의 내 마음을 표현했더니 제대로 된 이해도 받지 못하는 데다가 배은망덕한 딸로 받아들여졌다. 내 마음은 더 혼란스럽기만 했다. 불평불만 없이 자란 딸이 뜬금없이 그런 말을 하니 부모님도 당황하셨을 것이다.


최근에 읽은 책 <서툰 감정>은 내가 그동안 왜 힘들었는지,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당신의 부모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감정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사랑을 베풀어주고, 듣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들려주는 부모에 대한 이상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당신 스스로 자신의 완벽한 부모가 돼라. 나는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일자, 모든 일이 바라던 대로 되지 않아서 많이 힘들지. 너는 그것을 얻기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했고, 진심으로 그것을 원했어.”
그리고 내가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럴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그것은 나의 슬픔과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내는 눈물이다. 그렇게 한참 눈물을 흘리고 나면, 내가 원했던 것을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가 된다. 두 팔로 자기 자신을 안아주고 쓰다듬는 동작은 위로의 감정을 더욱 강화시킨다.

일자 샌드, 서툰 감정, pp. 114~115


완벽한 부모란 없다, 내가 나의 완벽한 부모가 돼라.

완벽한 부모란 없으니 내가 나의 완벽한 부모가 되라고? 내 감정을 알아채 주고, 내 마음을 읽어 주고, 나를 위로해 주고 지지해 주는 나?


생각해 보니 내가 나에게 말을 걸어 주고 나를 대접해 주는 걸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 내 행동은 내 내면의 말보다는 남들의 시선에 따라 움직였다. 내가 나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으니 내면의 나는 자꾸 침묵했다. 가만히 있으니 괜찮은 줄, 잘 있는 줄로만 알았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보는 나처럼 말이다.


나를 자꾸 대접하고 내 마음의 곳간을 나의 위로와 지지로 채웠더니 내가 몰랐던 나의 모습이 조금씩 나타났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먹고, 내가 좋아하는 공간에 가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랬더니 누군가의 인정과 위로에 목말라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사춘기 아이의 말에 더 이상 상처받지 않고, 눈물 흘리지 않기로 했다. 아이는 이렇게 쏟아내며 완벽한 부모는 없다는 걸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아이가 언제까지 비난의 말을 쏟아낼지는 알 수 없다. 사춘기 때 모든 걸 쏟아냈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다.


내가 아이에게 위로와 지지가 되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지만, 내 마음은 아이의 마음에 가닿지 않는다. 아이가 내가 해 주지 못한 위로와 지지를 스스로에게 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노력하는데도 아이가 쏟아내는 말에 무너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건 어쩔 수 없다.

나는 완벽할 수 없기에.



Photo by Mayank Dhanawad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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