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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 Mar 10. 2023

싸우고 실망하고 웃고

사춘기의 시작


몇 달 전에 화장실 문고리가 고장 났다. 문고리를 어떻게 빼는지 몰라서 몇 달째 방치해 놓고 있었다. 그러다 요즘 '내가 살고 싶은 공간'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면서 새로운 문고리를 사서 어서 교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고리를 빼는 나사가 보이지 않는데 이걸 어떻게 뺀단 말인가?' 하는 생각에 몇 달 동안 멈춰 있었는데 이날 갑자기 문고리 교체 방법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 문고리와 유사해 보이는 이미지를 찾아서 봤더니, 커버를 벗길 수 있는 방법이 보였다. 


일자 드라이버를 이용해 살살 위로 밀어줬더니 커버가 쉽게 벗겨진다. 이렇게 쉬운 일을 몇 달째 미뤄두고만 있었다니... 이건 분명 의지의 문제였다. 여기까지 한 뒤 회사에 갈 시간이 다 돼서 뒷일은 남편에게 맡겼다. 신발을 신으며 슬쩍 보니 남편은 손잡이까지 분리를 했는데, 안쪽의 부품이 분리가 안 돼서 문고리를 빼지 못하고 있었다. 


회사에 있는 동안 문고리를 빼냈다는 소식이 오지 않아 궁금했다. 아니나 다를까 퇴근해서 보니 문고리는 부품이 걸려 있는 채로 그대로 있었다. 바닥에는 자잘한 나무 가루들이 떨어져 있었다. 남편은 힘으로 빼낼 수 있는 게 아닌데 힘으로 빼내려다가 포기하고 서둘러 출근한 모양이었다.


외투를 벗고 드라이버를 잡았다. 드라이버를 들고 이리저리 헤집어보다가 안되겠어서 푸름이를 불렀다. 


"푸름아 이거 어딘가를 누르면 분해가 될 것 같은데, 안 된다. 어디일까?" 


푸름이는 드라이버를 내 손에서 받아 잡더니 이리저리 건드려 본다. 그러더니 "됐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간다. 어머나... 아빠보다 엄마보다 나은 아들일세.


"푸름아 어떻게 했어? 대단하다."

"아니 왜 그걸 못해요? 버튼을 누르면 되잖아요. 누르니까 바로 분해되던데. 문고리 뺐으니까 5분 줘요."


"그래"


쏘쿨 푸름이다. 거기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받아낼 시점도 정확하게 포착한다. 핸드폰 사용 시간 5분!


서둘러 문고리를 주문했다. 이제 새로운 문고리만 장착하면 된다. 근데... 문고리가 오기 전까지 문고리가 있던 부분에 나 있는 동그란 구멍을 막아야 했다. 두꺼운 종이로 구멍 부분을 가린 뒤 테이프를 붙이려는데 혼자서는 힘들었다. 낑낑대다가 푸름이를 불렀다. 


"푸름아 도와줘. 이거 혼자 못하겠어."

"형도 있는데 왜 자꾸 저를 불러요. 그거 혼자 할 수 있겠는데 왜 못해요?"


초록이 데리러 갈 시간은 다가오고 테이프는 잘 붙여지지 않고... 짜증이 났다.


"엄마는 혼자 못하겠어. 너는 혼자 할 수 있다고 했으니 혼자 해 봐. 엄마 오기 전에 이것도 붙이고 청소도 다 끝내 놔."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알았으니까 나가요."


나는 버럭 했고 푸름이는 짜증을 냈다. 문고리를 빼냈던 멋진 푸름이의 모습은 사라졌다. 좀 도와달라는 말을 성의 없이 거절하는 푸름이에게 화가 났다. 화를 잠재울 틈도 없이 서둘러 옷을 입고 초록이를 데리러 갔다.


어린이집까지 걸어가며 씩씩거림을 잠재웠다. 내가 잠재우려고 노력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감정이 잦아들었다. 아이들을 태우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노란 차들, 내가 끄는 킥보드에서 나는 덜덜덜 소리, 서로 각자의 방향으로 거리를 유지하며 걷는 사람들, 개업한 지 얼마 안 된 식당에 가득 찬 사람들을 구경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씩씩거림이 사라졌다.


어린이집 문을 열고 나오는 초록이를 보고 나는 웃고 있다. 좀 전에 화내고 온 사람 맞지? 어린이집 가방을 열어 보니 자동차가 3개나 있다. 오늘은 자동차를 3개나 가지고 갔구나? 

초록이는 Jeep, 랜드로버 Defender, 레미콘 자동차를 한 손에 쥐더니 안 되겠는지 나에게 하나를 건넨다.


"엄마 크리스(레미콘) 또가또까(똑같아 똑같아) 해요" 

가다가 레미콘이 지나가면 손에 있는 레미콘 자동차를 들고 '똑같아 똑같아'를 외치라는 말이다. 


초록이와 같이 걸을 때는 자동차를 보느라 바쁘다. 우리는 걸어가며 Jeep 자동차를 보고 또까또까 했다. 디펜더 자동차는 만나지 못했지만 빨간색 랜드로버를 만나며 흥분했다. 아쉽게 레미콘은 만나지 못했다. 


도로를 달리는 다양한 자동차를 구경하다 보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마지막까지 자동차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초록이와 집으로 향했다.


집에 와서 보니 정리하다 만 폴더매트들이 거실에 정신없이 놓여 있다. 

"뭐야? 아직 청소 안 한 거야?" 다시 화가 올라올 뻔했다. 손을 씻으려고 화장실에 갔는데, 문고리 쪽 구멍이 깔끔하게 메워져 있다. '혼자서 했구나. 역시 푸름이의 솜씨는 다르다. 엄마보다 낫다.' 내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푸름아 이거 혼자 했어?"

"엄마는 이걸 왜 혼자 못해요? 그냥 하면 되는데"


"엄마는 너보다 능력이 모자라잖니. 그러니까 네가 좀 도와줘."

"싫은데요."


"치...."


푸름이의 거절이 기분 나쁘지는 않다. 이게 푸름이만의 방식이라는 걸 알기에. 엄마가 부탁하면 퉁명스럽게 거절하겠지만 혼자 또 기특하게 뚝딱 해 줄 걸 알기에.


푸름이는 정리하다 만 매트를 제대로 정리하고, 맑음이는 청소기를 돌렸다. 열렸던 창문을 닫고 높이 쌓인 매트를 하나씩 다시 깔았다.




다음 날 퇴근해서 와 보니 거실에 빈 택배 박스가 놓여 있다. 뭐가 왔었나 봤더니 문고리가 들어 있었던 흔적이 보인다. 화장실 문을 보니 새로운 문고리가 달아져 있다. 푸름이가 혼자 뚝딱 설치한 모양이다.


푸름이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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