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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 Mar 08. 2023

담임 선생님의 전화

사춘기의 시작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는 잘 받지 않지만 9시 조금 넘어서 온 전화는 왠지 급한 용무가 있는 듯해서 받아 보았다. 어머나... 푸름이 담임 선생님 전화다.


"안녕하세요. 저 푸름이 담임인데요. 오늘 푸름이가 지각을 했어요. 첫날부터 지각을 했길래 지각하면 교실 청소를 한다고 해서 첫날 청소를 하고 갔어요. 다음 날 또 지각하면 이번에는 복도까지 청소해야 한다고 했는데, 오늘 또 지각을 해서 복도까지 청소를 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네..."


"근데 푸름이가 그 말을 듣더니 '선 넘네'라고 저에게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말은 교권 침해 발언이다. 네가 이런 발언을 했기 때문에 선생님은 너에게 경고를 줄 거고 이게 누적되면 따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알려줬더니 바로 사과하긴 했습니다."

"아.. 선생님..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푸름이가 악의가 있어서 이 말을 한 건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어쨌든 이 말은 교권 침해에 해당하고, 또 이틀 연속 지각을 했기 때문에 오늘은 교실 청소, 복도 청소, 명언 필사를 하고 하교를 할 예정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푸름이가 오늘 늦잠을 잤는데, 늦지 않게 가려고 노력했어요. 아마 아슬아슬하게 늦었을 거예요."


"네 많이 늦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저희 반에서 유일하게 푸름이만 이틀 연속 지각했어요. 집에서도 지도 부탁드립니다. 중학교 생활기록부는 고등학교 진학하는 데 영향을 미쳐서 저희 학교는 8시 30분까지 등교하도록 지도하고 있거든요."

"네, 알겠습니다."


푸름아.. 푸름아...왜 그랬니? 눈앞에 푸름이가 있다면 바로 한마디 하고 싶었다.


남편에게 하소연을 한바탕 하다 보니 눈물이 났다. 나는 또 저 멀리까지 가 있었다. 우리 푸름이가 공교육을 마칠 수 있을까? 갑자기 학교 안 간다고 등교를 거부하면 어떡하지?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하면 잔소리처럼 들리니 남편에게 푸름이와 대화 좀 해 보라고 했다. 남편은 푸름이와 조용히 대화를 해 보겠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사실 오늘 아침에 푸름이가 늦지 않으려고 후다닥 가방을 챙겨서 가는 모습이 반가웠다. "학교는 왜 가야 해요? 교복은 왜 입어야 해요?" 라며 가뜩이나 학교 생활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던 터라 늦게 일어나서 학교 안 가겠다고 버티면 어떡하나 걱정스럽기도 했다.


푸름이의 심리가 어떻든 학교는 규칙대로 돌아간다. 담임 선생님은 1~2분 지각한 것도 명백한 지각이니 교실 청소에다 복도 청소까지 하라고 하셨겠지... 그게 이 학교에서는 최선이겠지.




퇴근길에 횡단보도에 서 있었더니 저 멀리서 푸름이가 나를 반갑게 부른다. 밖에서 만나면 모른 척하자고 하더니만 엄마를 이렇게 반갑게 불러 주니 기분이 좋다. 푸름이에게 달달한 간식을 주며 푸름이 표정을 얼른 훔쳐보니 그닥 기분 나쁜 표정은 아니다. 교실 청소에다 복도 청소, 필사까지 하고 왔을 텐데 괜찮았나 보다.


푸름이를 집으로 보내고 초록이 어린이집에 들렀다. 날씨가 좋아 초록이와 바깥에서 시간을 보내다 집에 들어갔다. 집에 도착해서 남편에게 푸름이와 대화 좀 나누었느냐고 물어보니 기회를 보고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학교에서 많이 혼나고 왔는데, 집에서 또 혼내면 아이도 힘들 듯해서 오늘 얘기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한다. 일단 남편과 나는 푸름이의 오늘 학교 생활에 대해 모른 척하기로 했다.


남편이 쉬는 날에는 저녁에 주로 외식을 하거나 바깥 음식을 포장해서 먹기 때문에 푸름이에게 뭘 먹고 싶냐고 물었다. 치킨이나 피자, 치즈볼이 먹고 싶다길래 푸름이가 먹고 싶다는 걸로 준비했다. 

조용히 먹다 내가 말문을 열었다.


"푸름아 엄마가 오늘 책을 읽다가 푸름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구절을 발견했어."

"뭔데요?"


"이탈리아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사회 규범을 거스르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기 개성을  표출하고 자기 감정을 말할 수 있도록 키워진대. 이 사람들은 규범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그 안에서 자신의 권리를 찾는 똑똑한 사람들인가 봐."

"그래요?"


"푸름이도 규범에 의문을 제기하는 건 좋은데, 규범 안에서 너의 권리를 주장하는 똑똑한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어. 너의 에너지를 규범을 비판하는 데 쓰기보다는 규범 안에서 너의 권리를 찾는 데 썼으면 좋겠어. 그게 진짜 똑똑한 거야."

"저..... 오늘 지각했다고 청소하고 왔어요."


"엉?"

"그리고 '선 넘네'라는 말을 했다고 선생님한테 경고받았어요."


"진짜?? 푸름아 선생님은 너희 편이야. 선생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건 옳지 않아."

"선생님한테 한 말이 아니었어요. 그냥 혼잣말로 한 건데, 그걸 선생님한테 말한 거라고 오해한 거예요."


"아이고.... 선생님이 너와 말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네가 그런 말을 한 건 선생님에게 했다고 받아들일 수 있지. 규칙을 비판만 하지 말고 일단 받아들인 뒤 너의 의견을 말하자. 그리고 '선 넘네' 이 말은 절대.... 너보다 나이 많은 사람 앞에서 쓸 수 있는 말이 아니야. 나이 어린 사람에게 쓰더라도 기분 나쁜 말이야."

"네. 알아요. 저도 모르게 나왔어요. 근데 저희 선생님 너무 까다로워요."


"그럴 수 있어. 스무 명이 넘는 아이들과 안전하게 지내야 하니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몰라."

"네."


푸름이는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만 조금 억울하다는 눈치다. 사실 요즘 푸름이를 보면 온몸에서 억울함이 뚝뚝 떨어진다. 세상 모든 게 의문투성이인데 세상은 그걸 그냥 받아들이라고 하고, 자기 혼자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사회는 자꾸 본인을 어리다고만 한다.


푸름아 너의 마음 구석구석을 세세히 알아주는 선생님이 있을까?

네가 마음을 활짝 열 수 있는 선생님이 있을까?

그런 선생님을 만난다면 좋겠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지.


그나저나 엄마는 네가 규범 안에서 자유롭게 지냈으면 좋겠구나. 네 에너지를 너를 위해 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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