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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 Mar 15. 2023

중간 결재자

사춘기의 시작

푸름이가 가정 통신문을 쓱 내민다. 곧 있을 공개 수업 참석 여부를 묻는 내용이었다.


3월 초에 학교에서 나눠준 달력을 보니 다음 주 수요일에 '수업 공개의 날'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날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남편에게 푸름이 반 공개 수업에 참석해 보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남편은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엄마 아빠의 일정과 생각이 어떻든 푸름이는 '답정너' 태도로 나에게 말했다.

"엄마 절대 오지 마세요. 불참으로 체크해요."

"어?"


'초등학교 졸업식도 못 오게 한 아들인데 공개 수업을 오라고 하겠어?' 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불참'에 동그라미를 쳤다. 비록 불참이라고 표시했지만, 몰래 가서 보는 건 가능할 듯해서 푸름이에게 엄마 가고 싶은데 왜 못 가게 하느냐고 따지지는 않았다.


학기 초라서 가정 통신문에 사인할 일이 자주 있는데, 푸름이는 그때마다 나에게 답을 먼저 말한다.


"엄마 이건 동의로 체크해야 해요."

"엄마 이거 제대로 써요. 이상한 거 쓰지 말고요."


흐음... 선생님께 최종적으로 전달되기 전에 중간 결재자가 있는 듯하다. 중간 결재자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백'하고 돌아오는 종이를 보면 말이다. 난 분명히 푸름이의 보호자 입장에서 사인을 하는데, 푸름이의 태도를 보면 난 푸름이의 부하 직원이 된 것 같다.


가끔 학교에서 설문 조사 할 일이 있으면 구글 폼으로 작성하게 하던데, 가정 통신문은 그렇게 안 되나? 사인 때문에 안 되는 건가? 중간 결재자 때문에 내 의견을 제대로 전달하기 어려우니 이런 시스템이 빨리 도입되면 좋겠다.


그나저나 부모 상담 가통은 받아보지도 못했다. 이건 아예 주지 않는다. 학교 알리미에는 이미 올라와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상담을 할 사람만 제출하는 서류이기에 푸름이 선에서 '컷'을 했나 보다.


어렵구나... 아마도 선생님은 내가 상담을 하러 오기를 바랄 듯한데, 중간 결재자가 컷을 이미 해 버렸으니 따를 수밖에. 무슨 일이 있으면 저번처럼 담임 선생님이 전화를 주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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