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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 Mar 17. 2023

저 영어 포기했어요

사춘기의 시작

2015년 6살 푸름이는 어린이집에서 영어를 배우고 와서 나에게 말했다.


"엄마 강아지가 영어로 뭔지 알아요?"

"'독(dog)'이지."(전형적인 한국식 발음으로)


"'독'이 아니라 '드어그'예요."

"오~ 푸름이 발음 좋다. 그럼 개구리는 뭔지 알아?"

"프러으그예요."(f 와 r 발음을 정말 정확하게 한다.)


6살 푸름이는 엄마의 발음도 교정해 줄 정도로 영어에 관심을 보였고 7살에도 영어 노래 등을 배우며 영어에 흥미를 키웠다. 그러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푸름이의 영어 공부(노출)는 3학년에 될 때까지 멈췄다.


공교육을 믿었고, 사교육은 본인이 스스로 원할 경우에만 시키겠다는 엄마의 교육 철학으로 푸름이는 3학년 때 학교에서 알파벳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이 나이에 무슨 학원이야? 늦게 시작해도 하고 싶다는 욕구만 있으면 다 따라갈 수 있어. 엄마는 이렇게 자만했다.


하지만 푸름이가 3학년 교실에서 접한 영어는 흥미와는 거리가 멀었고 친구들과 엄청난 실력 차가 있다는 현실만 깨달았을 뿐이었다. 7살에 알았던 알파벳도 이제는 가물가물해진 푸름이와 프리토킹에다 리딩과 라이팅이 되는 친구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했다.


푸름이는 영어에 거부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원하면 학원에 보내 줄 수 있다고 했지만 아이는 학원도 거부했다. 물론 집에서 형이 하던 파닉스 책도 가끔 보고 단어도 외우긴 했지만, 이걸로 영어 실력을 키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건 푸름이와는 맞지 않은 시스템이었다.


형인 맑음이는 3학년 때 파닉스 책 한 권으로 영어의 감을 잡았고, 영문법 책을 공부한 뒤 문장도 술술 만들어냈다. 기초적인 문장이긴 했지만 이 정도 수준이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 수준만 유지한 채 중학교에 갔더니 담임인 영어 선생님께서 아이 실력이 아주 바닥은 아니라고 했다. 아주 바닥은 아니라는 건 무슨 뜻일까... 공부하면 올라갈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것일까? 공부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지만 영어를 읽고 쓸 수 있는 정도라는 것일까?


맑음이도 스스로 느꼈다. 아이들과 본인의 실력 차가 크다는 걸. 맑음이는 그때부터 영어 학원에 보내달라고 했고 본격적으로 사교육을 시작했다. 사교육은 달콤한 열매와 같았다. 몇 달 만에 실력이 쭉쭉 상승해서 2학년 1학기 중간고사는 90점대를, 1학기 기말고사에서는 100점을 받아왔다.


푸름이도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았다. 바닥이 아닌 수준 정도로만 스스로 하게 한 뒤 중학교 때부터 원하면 학원에 보내는 것으로... 하지만 푸름이는 맑음이의 반도 따라오지 못했다. 영문법 책을 본 적도 없고 문장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본인도 답답했는지, 해도 안 되는 것 같은지 6학년 때 대놓고 말했다.


  "저 영어 포기했어요."


난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아직 초등학생인데 벌써 영어를 포기포기했다고? 영어를 얼마나 배웠다고 영어를 포기해?


중학교에 입학한 뒤 푸름이는 또 한 번 엄청난 영어 실력 차를 실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맑음이와 달리 아무 말이 없다. 포기했기에 충격도 없는 건가?


며칠 전 갑자기 푸름이가 영어 공부를 시작하겠다고 한다.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물었다.

"형 다니는 학원에 자리 있는지 알아볼까?"

"저는 학원 같은 거 안 다녀요. 엄마는 진짜, 오버 좀 하지 마요."


"혼자서 어떻게 하려고? 방법이 있어?"

"저는 책으로 공부할 거예요."


가만히 살펴보니 윔피키드 원서책을 조금씩 읽고 있는 눈치다. 그 책이 읽어지나? 가끔 아주 기초적인 단어를 물어봐서 걱정했는데... 푸름이 실력에 책이 읽어지는지 궁금했다. 그러다 그 책을 다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해리포터 마법사의 돌> 원서를 사달라고 했다. 영풍문고에 사러 갔는데 없더라며 돈을 줄 테니 주문해 달라고 한다.


"엄마가 사 줄게. 얼른 주문해야겠다."


서둘러 책을 주문했다. 아이가 공부를 하겠다는데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없지. 우리 집에서 사교육비가 전혀 안 드는 유일한 존재 푸름이가 공부하겠다고 책을 사달라는데, 맑음이 학원비만큼 사달라고 해도 당연히 사줄 수 있지.


요즘은 간간이 팝송도 부른다.(어제는 I'm still fucking christian~ 하며 거실에서 춤을 추며 돌아다니길래 팝송을 부르는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노래는 지올 팍의 christian이었고 지올 팍은 우리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리나라 가수였다. 이게 우리나라 가수의 노래라고??? 엄마는 이 가수가 한국인이라는 것에 놀라고 뮤비의 신선함(?)에 또 놀랐다.)


푸름이는 푸름이만의 방식으로 영어 공부인지, 취미 생활인지 모르겠는 영어를 즐기고 있다. 다행이다. 이렇게라도 영어를 놓지 않아서. 스스로 영어를 하겠다고 해서...


내가 할 일은 그냥 지켜보다가 공부하는 데 필요한 거 사달라고 하면 지체하지 않고 사 주는 것, 그것뿐이다.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건, 먼저 나서서 이거 필요하지 않니?라고 물어보는 것이다.


사실 푸름이는 해리포터 책을 1권만 사달라고 했는데, 성격 급한 엄마는 7권 세트를 사 버렸다. 푸름이에게 7권을 다 안겨 주고 싶었지만, 이건 푸름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닌 걸 알기에 1권만 빼서 책상에 놔두었다. 푸름이가 2권 사달라고 하면 주문하는 척하면서 쓱 빼서 2권을 줄 생각이다. 푸름이가 1권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멈출지, 2권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으로 연결될지 아직 아무것도 모르면서 엄마는 또 앞서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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