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소식을 들으러 초록이와 오랜만에 산에 다녀왔어. 초록이는 네발자전거를 타고 산에 가고 싶어 했어. 산 입구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가 산을 넘고 다시 돌아와서 자전거를 찾아 타고 오는 코스라면 괜찮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산을 넘어서 공원에서 놀다가 시장을 들러 집으로 돌아오는 코스로 움직일 거라 다시 입구까지 갈 수 없었거든. 아쉬워하는 초록이에게 킥보드는 괜찮다고 했더니 초록이는 망설이다 킥보드를 들고 집을 나섰어.
산 입구까지 초록이는 킥보드를 정말 씩씩하게 밀며 갔고, 나도 보폭을 크게 해서 열심히 걸었지. 입구에 도착해서는 초록이가 킥보드를 나에게 맡기더니 열심히 뛰어다니기 시작했어. 그러다 힘들었는지 다시 킥보드를 달라고 하더니 산의 오르막길을 어떻게든 킥보드를 타고 가려고 하더라. 오르막길은 킥보드를 타고 가는 게 더 힘들다는 걸 몰랐던 거지.
이 모습을 본 한 어르신이 초록이를 보고 말을 거시는 거야.
"아이고 여기를 이렇게 올라가려고? 씩씩하네."
낑낑대며 킥보드를 밀며 올라가는 모습이 귀여웠나 봐. 가만히 서서 초록이를 보시길래 나도 그분 얼굴을 봤지. 그런데 글쎄 그분이 예전에 우리 회사에서일하셨던 여사님이신 거야. 무기직 전환이 한창일 때, 미화 업무가 용역 계약에서 직접 계약으로 바뀌면서 만 59세가 넘으신 분들은 일을 그만두어야 했었어. 당시 왕언니로 통하셨던 그분은 아마 예순이 훨씬 넘었었지. 그 이후로 그분을 못 뵈었어. 그러다 이렇게 우연히 만난 거 있지.
나를 아직도 기억하시는지 "어머 이게 누구야?" 하며 먼저 알은척해 주시더라. 고마웠어. 아직도 그 회사를 다니고 있고, 그때 그 아이들은 이제 중학생이며 지금 이렇게 늦둥이를 키우고 있다고 내 안부를 전했지. 우리는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었기에 잠시만 머물렀다 헤어졌어. 초록이는 낯선지 눈만 크게 뜬 채 꾸벅 인사를 하더라.
헤어지고 나서 생각해 보니 여사님의 안부를 물어보지 않은 거야.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건강은 어떤지 등등... 좀 전에 보니 몸도 좋아 보이셨고, 목소리도 그때처럼 우렁차시더라고. 그걸로 그냥 혼자 추측했지. 건강하게 잘 지내시나 보다. 그래도 물어봐 줄걸... 죄송하고 아쉬웠어.
아직 절반도 안 갔는데, 초록이는 힘든지 킥보드를 다시 나에게 맡기고는 천천히 걸었어. 걸으면서 주변의 나무를 자세히 보니 수줍게 싹이 나오고 있더라.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아직은 봄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말이야.
"엄마 이거 봄이 오는 소식이다. 이것도."
새싹을 가리키며 봄이 오는 소식이라고 알려 주었더니 초록이는 나무 하나하나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나에게 계속 이렇게 말해주는 거야. ㅎ 귀여웠어.
조금 걷다 보니 눈에 띄는 봄이 보였어. 저 멀리 산수유나무가 노랗게 꽃을 피웠더라고. 저 멀리서도 또렷하게 보이는 노란색. 갈색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노란색 산수유나무를 보니 진짜 봄이 온 게 느껴졌어.
봄의 소식을 천천히 들으며 산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공원이 보이는 거야. 초록이는 다시 힘이 났는지 킥보드를 끌고 씽씽 달려갔어. 나는 원형 공간의 가운데에 서서 차가운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초록이를 바라보고, 초록이는 얼굴이 발개질 때까지 킥보드를 타며 그곳을 돌았지. 오늘따라 넘어지는 애들이 많았어. 크게 다치지는 않아서 다행인데, 서로 속도를 내다가 부딪쳐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어서 초록이에게 계속 속도를 줄이라고 소리쳤어. 초록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신나게 킥보드를 타더라. 이대로 두면 깜깜해질 때까지 탈 기세야.
초록이를 붙잡고 시장에 들러 초록이가 좋아하는 떡을 사 먹자고 꼬드겼어. 초록이는 지쳤는지 킥보드 위에 두 발을 올려 놓더니 나에게 끌어달라고 해. 그럴 만도 하지. 낮잠도 안 잤지, 산을 탔지, 공원에서 신나게 놀기까지 했으니 말이야.
킥보드를 끌고 시장으로 가고 있는데, 어머나... 초록이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A 어린이집 선생님을 만난 거 있지? 선생님은 시장을 봐서 집에 가는 길이었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 초록이가 그곳을 많이 그리워한다고 말씀드렸더니 아주 어릴 때부터 다녀서 아마 초록이에게는 그곳이 친정 같은 곳일 거라고 말씀해 주시더라. 맞아... 친정 같은 곳. 갈 수 없는 친정이라는 마음이 아프긴 하지만... 그런 곳 맞아.
선생님을 보낸 뒤 시장에 들러 초록이가 좋아하는 꿀떡을 사고 맑음이가 좋아하는 약식을 샀어. 그러고 집으로 향했는데, 푸름이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도 못 샀다는 게 마음에 걸리더라. 푸름이는 떡을 좋아하지 않거든. 우리는 시장을 벗어나 걷다가 다시 되돌아서 시장으로 향했어. 요즘 들어 닭강정집이 시장에 계속 생기고 있다는 걸 캐치한 지 얼마 안 된 터라 어디가 맛있는지는 잘 모르는 상태로 한 집을 찾아가 닭강정을 주문했지.
그런데 이게 웬일이야? 맑음이가 유모차 타던 시절, 하원길에 항상 어묵을 사 먹었던 그 집 사장님이 닭강정집을 차린 거 있지? 닭강정이 튀겨지는 동안 우리는 지난 시간을 이야기했어. 그때 어묵을 사 먹던 꼬마가 지금은 중학생이라고. 그 어묵 정말 맛있었다고... 거기서 팔던 회오리 감자도 맛있었다고... 겨울에 어묵 다시 하시면 안 되겠냐고... 사장님도 추억에 젖은 표정으로 그 시절을 이야기하더라고. 지금도 누군가는 그때 팔던 어묵, 그때 팔던 국수 정말 맛있었다는 말을 한다고 말이야.
근데 이제 그 어묵을 맛보기는 어려울 것 같아. 당시에 큰 원형 통에다가 육수를 가득 넣어 어묵을 익혔는데, 그게 가스비가 어마어마하게 든다는 거야. 가뜩이나 올해 가스비 인상으로 다들 나 죽네 하는 시기라 그걸 다시 시작할 엄두를 못 내는 거지. 앙.. 아쉬웠어.
집에 돌아와서 아이들과 닭강정과 떡을 먹으며 그 시절 이야기를 나눴어. 맑음이도 기억하고 있더라. 어린 시절 매일 같이 사 먹었던 어묵맛을 기억하고 있었나 봐.
내 기억속에 새겨진시간을 같이 꺼내며 공감할 수 있는 존재가 이 동네 어딘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든든하더라. 이렇게 우연히 만나기도 하고자주 만나면 더 깊어질 수도 있는 존재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