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후기의 시, <시인들>
회사에서 비용을 지원해줘서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 원어민과 화상으로 만나 대화를 나누는 방식으로 말이다. 오늘 만난 선생은 영국 사람이라는데, "날이 너무 더워 땀을 식히고 있다"고 했다. 어디에 있길래 더위타령인가?
호주 남부라고 했다. 선생은 일 년 반째, 세상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있다고 했다. 다음달이면 호주를 떠날 예정인데 목적지는 슬슬 정하는 중이란다. 발리가 될 수도 있고, 오스트리아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다카하시 아유무의 여행 에세이 <러브 앤 프리>라는 책이 있다. 온통 여행만 하고 사는 저자에게 누군가 이유를 묻는다. 그러자 저자는 말한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별을 좀 더 알고 싶어서." 그 책을 청춘의 한복판에서 읽었다. 그리고 삶은 응당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날이 더워 땀을 식히고 있던 영국 선생의 라이프스타일은 스무 해 전 내가 꿈꾸었던 삶의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오늘, 여행하며 산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떠올렸던 건 이런 것.
여행이 밥 먹여 주나?
왜 이렇게 현실감각이 떨어지지?
나이 들어 어쩌려고 저러지?
낭만이 전부인 때가 내게도 있었다. 지금 내 안에서 낭만이란 단어는 꽤나 뜻이 바뀌어, 철없음의 다른 말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시를 읽고 글을 쓰는 내게, 낭만은 철없음의 다른 말이 맞는 것인가? 겨우 구한 돈을 가지고 밥 대신 꽃을 샀다는 옛날 시인. 그 사람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스물여섯 살, 요즘 같으면 막 무언가를 시작할 나이. 이시가와 다쿠보쿠에겐 가난과 각혈로 얼룩진 생이 이미 끝나버린 때, 죽기 전, 힘겹게 구한 5엔을 손에 쥐고 밥을 먹는 대신 꽃집에 들러 1엔어치 목련과 1엔짜리 꽃병을 샀다는 시인.
목련과 선동가는 다르지 않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꽃잎과 선언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다릅니다. 바닥에 떨어진 목련의 혈담(血痰)과 내려앉은 새들의 투병과 사월의 선동을 밥그릇보다 먼저 시라는 꽃병에 주워 담습니다.
그러나 결핍을 모르는 시인은 모자 속에서 시를 만들고 호주머니 속에서 악수를 준비합니다. 그러므로, 밥이 되고 남은 것들이 겨우 시가 되기도 합니다.
-박후기, <시인들> 전문, [서정시학] 2011년 봄호
밥 대신 목련을 샀다는 얘기는 기분을 좋게 만든다. 인생에 밥이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는 일화이라서일 것이다. 내가 돈 버는 기계가 아님을, 생존 말고도 인생에는 테마가 있음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밥벌이는 계속된다. 좀 더 충분히 밥값을 벌고 나면 그때는 뭘 하면 좋을까?
그때를 대비해 영국인 선생에게서 여행팁을 좀 구해두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2025.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