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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 vs. 진실

박준의 시와 신형철의 평론 <당신의 역사>

by 전새벽


치킨을 먹을 때 상대방에게 닭다리를 양보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는 큰 미덕처럼 통용되는 것 같다. 내 접시에도 닭다리를 올려준 사람이 몇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세계는 생각보다 다양한 취향으로 이루어진 공간인 것이다. 닭다리처럼 지방이 많은 부위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퍽퍽살 매니아도 있다. 나는 퍽퍽살 매니아까지는 아니지만, 닭다리에 붙어 있는 힘줄이 싫어 닭다리를 선호하지 않는다. 그래서 누가 내 접시에 닭다리를 올리며 부처님 같은 미소를 지을 때 난감하다. 어째야 하나. 맛있게 먹자니 내가 손해고, 돌려놓자니 약간 실례인 것 같고.


배려의 특이한 점은 그것이 진실을 감춘다는 것이다. 닭다리 양보가 꼭 서로에게 좋은 결과가 아님을 깨달은 뒤부터 나는 배려보다 진실을 앞에 둔다. 대부분은 결과가 좋았다. 그래봐야 누가 어느 부위를 먹을 거냐 정도의 문제들을 다뤘던 거니까. 좀 더 예민한 문제로 넘어가면 배려 vs. 진실 싸움에서 진실이 이기긴 상당히 어렵다. 예를 들어 같이 일하는 동료에게 피드백을 줘야 하는 상황이 그렇다.


배려가 때로 진실을 감추지만, 완성도 높은 상호간의 배려는 결국 셈을 원상태로 돌려 놓는다는 이야기를 한 시인이 있다. 박준 시인의 이야기이고, 그게 왜 눈여겨 볼만한 대목인지 설명해준 것은 신형철 문학평론가다. 신 평론가의 글에서 일부를 그대로 옮긴다.





책장을 넘기다

손을 베인 미인은

아픈데 가렵다고 말했고

나는 가렵고 아프겠다고 말했다


박준, <손과 밤의 끝에서는> 부분


이런 대목을 보면 박준의 '나'가 하는 사랑이란 '열정적 사랑도passionate love'도 아니고 '낭만적 사랑romantic love'도 아닌 것이 분명하다. 남성 시인의 격정적인 에로스가 상대방을 집어삼키고 자신도 파멸할 듯이 분출하는 순간도 없고, 운명적인 만남으로 삶의 문제가 해결되고 자아의 완성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작은 차이들의 연인이어서, 그의 사랑도 그저 작은 차이들에 민감한 사랑인 것으로 족하다. 이 작은 차이는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이에게는 '없는' 차이이지만 일단 감지하기만 하면 '큰' 차이가 된다. 위 시에서 두 사람은 같은 말을 순서만 바꿔 말한 것일까? 당신은 "아픈데 가렵다"라고 했는데 이는 '아파 보이겠찌만 가렵다'는 뜻으로 나를 안심시키려 하는 말이고, 나는 "가렵고 아프겠다"라고 했는데 이는 '가렵기보다는 아프겠다'라는 뜻으로 나는 네 아픔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하는 말이다. 그래서 같은 말이 아니게 됐다.


신형철, <인생의 역사(난다, 2022)> 중에서




박준과 신형철의 티키타카를 보고 있으면 문제가 금세 해결된 느낌도 든다. 시에서 미인은 '아픈데 가렵다'라며 but을 사용했지만, 화자인 '나'는 '가렵고 아프겠다'라며 and로 두 메시지를 묶는다. 그리하여 모두는 이분법적 사고로부터 해방되고 옳고 그름의 프레임에서 자유로워지며 배려 vs. 진실의 구도가 아닌 배려와 진실이 함께하는 화합의 장소로 이동한다.



그러니 누가 닭다리를 주거든 '저는 닭다리를 안 좋아합니다'라고 하지 말고, 닭다리도 좋지만 모가지를 더 좋아해요, 라고 수줍게 고백해보자. 동료에게 피드백을 해줘야 할 일이 있으면 나쁜 얘길 해야하나 감춰야하나 망설이지말고, 그로부터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을 고루 찾아 입체적인 피드백을 시전해주자. 그렇게 우리 함께, 배려와 진실의 공간으로 함께 이동하자.



202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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