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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김부장!

- 희망퇴직, 그리고 박세현의 시 <너무 많이 속고 살았어>

by 전새벽

뉴스에 모 회사의 희망퇴직 이야기가 떴다. 읽다보니 다른 회사들은 어떤 상황인가 싶어 검색창에 '희망퇴직'이라고 쳤다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화장품, 금융, 통신, 화학, 유통, 방송... 산업군을 가리지 않고 희망퇴직이 유행처럼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50대 이상을 하는 곳도 많고, 46세 이상을 대상으로 하는 곳도 있었다. 나도 멀지 않았다. 20대엔 몰랐는데, 이제는 안다. 기업이 효율화를 외치며 단행하는 희망퇴직의 이면에는 많은 생활인들의 불안과 탄식이 존재하고 있음을.


몇 살까지 월급 받고 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매년 건초더미처럼 마음 한 켠에 쌓이고 있다. 근래 유행했던 드라마가 거기에 불을 지폈다. 김부장. 아 김부장! 영원일 줄 알았던 시절은 왜 한 때이며, 기업은 왜 자꾸만 젊어지려고 하는 것이며, 긴 헌신 끝에 남는 것은 왜 자괴감 뿐인 것이냐. 내 인생이라고 다를 수 있을 것인가? 자신 없다. 나는 김부장이 될 예정인 전과장일뿐이다. 박세현의 시가 이 감정을 잘 포착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동창회에 나가

30년 만에 소집된 얼굴들을 만나니 그 낯짝 속에

근대사의 주름이 옹기종기 박혀 있다.

좀이 먹은 제 몫의 세월 한 접시씩 받아놓고

다들 무거운 침묵에 젖어들었다

화물차 기사, 보험 설계사, 동사무소 직원, 카센타 주인, 죽은 놈

만만찮은 인생실력들이라지만 자본의 변두리에서

잡역부 노릇 하다 한생을 철거하기에

지장이 없는 배역 하나씩 떠맡고 있다

찻집은 문을 닫았고 바다도 묵언에 든 시간

반생을 몇 걸음으로 요약하면서 걸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었던 간밤의

풍경들이 또안 피안처럼 멀어라


-박세현, <너무 많이 속고 살았어> 전문



글로벌 인재, 국가경제발전의 일꾼, 역사에 남을 드라마의 멋진 첫 에피소드... 신입사원 때 보고 듣고 생각했던 자아상이다. 그런데 전부 '자본의 변두리에서 잡역부 노릇 하다 한생을 철거하기에 지장이 없는 배역 하나씩' 에 불과했었나. 아니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노동 자체는 신성한 것인지 몰라도, 사회가 이룩해둔 노동환경은 비루하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 노동하지 말라고, 이제 그만하고 나가라는 구조적 다그침이 세월에 비례하는 크기로 저마다의 앞에 한접시씩 놓이는 꼴인 것 같아, 자꾸만 고개를 돌리고 싶어진다. 너무 많이 속고 사는 느낌이다.


2025.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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