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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헤시아 Feb 23. 2021

타율과 자율

새로운 지식은 단지 금기를 깨뜨림으로서만 얻어질 수 있다. 모든 자율적 사고는 죄의 인식을 동반하게 된다는 인류의 오랜 경험은, 내가 겪어 온 삶의 일생에서 체득한 근본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그 결과, 모든 신학적, 윤리적, 정치적 비판은 내적인 장애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것은 오직 오랜 내적 투쟁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극복되었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내적 투쟁의 과정을 통해 자신을 돌이켜 헤아려보는 내적 성찰의 중요성과 심각성의 무게를 높이 사게 해 주었다. 내가 뒤늦게서야 일반적인 지성들에게는 이미 오래전부터 공동의 터전이 되어 있던 결론에 도달했을 때에도, 그것은 여전히 내게는 충격적이고 혁명적인 의미로 가득 찬 듯이 여겨졌다. 신율(神律)이란 종교적 근본으로 채워진 자율이다. 단순하게 자율을 비판하는 것이 곧 새로운 타율에의 길을 용이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신적이거나 다양한 형태의 세속적인 권위에 복종하는 것, 즉 타율에 의한 복종은 정확히 말해서 내가 배척해온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에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또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당연한 것으로 항상 받아들여져 온 자율처럼, 참담한 투쟁 속에서 어렵게 쟁취된 자율은 그리 쉽게 굴복되지 않는다. 사람이 한 번 가장 거룩한 권위들의 금기와 관계를 끊으면, 그는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또 다른 형태의 타율에 굴종할 수는 없게 된다. 우리 시대에 있어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의미의 자율이 아닌 외부로부터의 타율에 의한 굴종이 그토록 수 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나기 쉬워졌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전통적인 권위를 둘러싸고 있는 공허함과 회의주의의 당연한 귀결이다. 투쟁을 통해서 얻어지지 않은 자유, 희생을 치르지 않은 자유는 쉽게 버려지고 만다. 


-폴 틸리히(Paul Tillich:1886-1965), '경계선에서'(On the boundary,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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