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허튼소리

'개' 이야기

by 파르헤시아

나는 때로 내 삶의 초라함, 한심함이 느껴질 때, 곧잘 스스로를 일러 '상갓집 개'나 '푸줏간 앞의 개'로 에둘러 말하곤 한다. '상갓집의 개'를 뜻하는 한자성어는 '상가지구'(喪家之狗)다. 「공자가어(孔子家語)의 곤서편(困誓篇)」이 그 출전이다. 「사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도 나온다.


상갓집의 개


상갓집은 사람이 죽어 장례를 치르고 있는 집, 즉 초상이 난 집이다. 공자가 심한 고초와 곤란을 겪으며 전국을 유랑할 당시, 공자의 제자들이 정(鄭) 나라의 한 노인에게 공자의 행방을 물었다. 이때 노인은, 자기 눈에 보이는 그대로, 공자의 행색을 이렇게 표현했다.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흡사 '상갓집 개' 같았소."(纍纍若喪家之狗).


노인의 이 말 한마디 안에 위대한 성인 공자의 파란만장한 현실의 삶이 모두 함축되어 있다. 상갓집은 애도하는 사람들, 조문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그 사람들을 접대하기 위해 항상 음식이 넉넉히 준비되어 있다. 그러나 상갓집의 주인 가족은 조문객들을 접대하고, 애도하느라 자기 집에서 키우는 개 먹이까지 돌아볼 여력이 없다. 음식은 풍성하지만 막상 개의 몫은 없다. 그래서 상갓집의 개는 굶주린 상태에 있다. 행여 자기에게 돌아올 음식이 있나 해서, 개는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주인의 눈치, 사람들의 눈치를 살핀다.


노인이 비유한 '상갓집의 개' 이 말속에는 보통 사람인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은 인간 공자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늘날에는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해서 실의에 빠져있는 사람', 혹은 '능력과 재주는 있지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 기회만을 호시탐탐 엿보는 사람'들을 가리켜 '상갓집 개(喪家之狗)' 같다고 한다.


푸줏간 앞의 개


'푸줏간 앞의 개'는 니체가 한 말이라고 한다. 한겨레 칼럼(2003. 4.11일 자)에서 철학 전공의 인문학자 고병권 선생이 언급한 말이다. 나름 찾아보니, 출전은 분명치 않다. 대신에 니체의 1882년 저작, 「즐거운 지식」(The Gay Science)에서 고통(pain)을 개에 빗대어한 말이 찾아진다.


"나의 개. 나는 내 고통을 '개'라고 이름 붙였다. "(Friedrich Nietzsche, 'The Gay Science' 1882 )


여하튼 고병권 선생의 말을 빌리자면, "푸줏간 앞엔 두 갈래의 길이 있다. 욕망을 접거나 용기를 내거나. 어느 쪽으로든 가지 않으면 그대로 ‘개’가 되고 만다. '용기가 없으면 욕망이 곧 고통이다'. 욕망은 용기를 통해 자유를 얻고, 용기는 욕망을 통해 풍요를 얻는다.". 다시 말해 '푸줏간의 개'는 '욕망과 이성사이에서 내면적으로 끊임없이 갈등하는 양태'를 의미한다.


파에몬의 개


인간의 삶과 관련하여 철학적 의미를 담은 개 이야기가 또 있다. '파에몬의 개(Phaemon's dog)'다. 이 말은 로버트 그레이브스 (Robert Graves)의 로마 역사 소설 '신(神) 클라우디우스 '(Claudius the God, 1935)에 나온다. 클라우디스는 집정관 출신의 로마 황제다. 정치력이 아닌 군사력을 지지기반으로 하여 군인 황제의 시대를 연 최초의 인물이다. 최측근의 고문이었던 비텔리우스 (Vitellius)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클라우디스 황제는 비텔리우스를 방문한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비텔리우스에게 물었다. "평소 나의 통치행위를 도덕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에 비텔리우스는, "파에몬(Phaemon)의 개가 옳았다."(Phaemon’s dog was right)라고 대답한다. '파에몬의 개'는, 언젠가 황제가 '파에몬의 개'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따라서 비텔리우스의 대답을 이해하려면, 먼저 '파에몬의 개'가 뭔지를 알아야만 한다. 소설에서 클라우디스 황제는 '파에몬의 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철학자 파에몬은 작은 개 한 마리 키웠다. 이 개는 매일 푸줏간 주인에게 가서 바구니에 고기 덩어리를 가져오도록 훈련되었다. 파에몬이 허락하기까지 결코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어느 닐 파에몬이 창밖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개가 평소처럼 고기 담긴 바구니를 물고 오는 중이었다. 그런데 집 앞에서 그만 동네의 사납고 난폭한 개들에게 뺏겨 버린 광경을 목격했다. 그런데 파에몬의 충직한 작은 개는 바구니를 되찾을 노력을 하지 않고 잠시 머뭇거렸다. 파에몬이 생각하기에도 빼앗긴 고기 바구니를 되찾으려 시도하는 것은 헛수고나 다름없었다. 자칫 사나운 개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 분명하다. 파에몬은 자기 개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윽고 개는 뭔가를 결심한 듯이 난폭한 개들을 향하여 맹렬하게 돌진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자기도 바구니의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크게 한 점 베어 물었다. 심지어 동네의 난폭한 개들보다 더 많은 고기를 먹었다. 그 이유는 자명했다. 그 작은 개가 똑똑하고 용감했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Robert Graves, 「Claudius the God」, 1935)


철학자 파에몬(Phaemon)이란 인물은 역사의 기록에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 로버트 그레이브스가 만들어 낸 가공의 인물로 추측된다. 따라서 '파에몬의 개'는 허구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개의 주인인 파에몬이 직접 목격했다는 것에 있다. 이 때문에 파에몬이 비록 자신의 충성스러운 개에게 실망은 했다 할지라도, 화는 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전후 사정을 직접 눈으로 봄으로써 개의 사정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파에몬의 개'가 이 사건 이후의 행동 혹은 태도의 변화다. 파에몬의 충직한 개로 살기를 포기하고 난폭한 동네 개들 무리에 휩쓸려 본능적인 삶을 선택했느냐, 아니면 본래의 충직한 '파에몬의 개'로 복귀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이에 대해서 작가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독자의 입장에서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만약 개의 입장에서라면, 비텔리우스의 마지막 대답의 의미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즉 "당신이 말했던 파에몬의 개는, 분명 옳은 행동을 한 것입니다". 다만 행동 또는 판단의 주체를 누구에 두느냐에 따라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자기를 파에몬, 황제를 개로 환유한 경우다. 참고로, '환유'란, '어떤 사물을, 그것의 속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다른 낱말을 빌려서 표현하는 수사법'이다. 즉 "당신의 통치행위는 정의적· 도덕적으로는 옳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최측근에서 당신의 모든 행동을 지켜봤기 때문에, 비록 내적 갈등은 있었지만, 적어도 당신의 입장에서는 옳은 행동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자기를 개, 황제를 파에몬으로 환유한 경우다. "내 비록 내적 갈등은 있었지만, 당신의 통치행위가 정의적· 도덕적으로 옳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성과 현실 사이에서 내 본능에 따라, 당신을 적극 추종하고 당신의 손발이 된 나의 행위는 옳았습니다."


결국 황제와 비텔리우스 각각의 입장에서는 두 사람 모두 '옳았다'는 나름의 결론에 이른다. '파에몬의 개'가 그 상황에서 자신의 본능에 따라 행동한 것처럼 말이다. 당연히 이성 중심의 인간과 본능 중심의 동물인 개는 사뭇 다른 존재다. 이성과 양심으로 본능을 통제하는 것은 오직 인간만의 특성이다. 아울러 오직 인간만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자기 합리화와 자기 정당화라는 독특한 심리적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는, 비텔리우스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없이 황제와 자신을 '개'와 마찬가지였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똑똑하고 용감하다'는 사실만으로 '파에몬의 개'처럼 인간의 행위를 전부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할 수는 없다. 절체절명의 동일한 상황 앞에서 어떤 사람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비장(悲壯)하게 죽음을 선택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신념과 상관없이 비굴한 생존을 선택하기도 한다. 물론 다른 해석의 여지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 외의 다른 해석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생존과 본능 사이에서


정리하면, 세 유형의 개는 모두 세 가지의 공통점이 있다. 첫째, 사람에 의해 길들여진 개들이다. 둘째, 사회적이든 본능적이든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 그 목적은 생존과 직결되는 식욕에 관한 것이다. 셋째, 세 경우 모두 관찰자의 시점이다. 물론 관찰자의 시점에서, 세 경우의 개들은 철학적인 의미에서든, 혹은 정의적· 도덕적· 윤리적 차원에서든 어느 것이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른가의 비교우위를 논할 수는 없다. 생존과 본능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굳이 구분하자면, '상갓집의 개'는 비록 속내는 감추고 있지만, 내적 갈등이 겉으로 드러나 제삼자에게까지 느껴지는 독특한 상태다. 반면에 '푸줏간의 개'는, 겉으로 드러난 상태는 초상집의 개와 동일하지만, 노골적으로 호심탐탐 먹이를 노리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관찰하는 제삼자들에겐 늘 보는 익숙한 광경이기 때문에, 의당 '그러려니'한다. '파에몬의 개'는 비록 본능적 욕망에 따랐지만, 내적 갈등을 이성의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극복하고 본능에 맞게 실행한 상태다. 앞의 두 개의 경우와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관찰자의 시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면, 푸줏간 앞의 개는 노골적으로 의식하고 호시탐탐 고기를 탐내고 있다는 점에서, 먹이에 대해 수동적으로 길들여진 상갓집의 개와는 다르다. 다만 본능의 선택에 따르는 파에몬의 개와 연관시켰을 때 다양한 상상이 가능해진다. 푸줏간의 개는 항상 주인의 눈치를 살핀다. 아마도 그 개는 이미 고기의 맛을 알고 있을 것이다. 동시에 늘 무시무시한 칼을 들고 있는 푸줏간 주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 직·간접적인 경험, 또는 여러 번의 학습 혹은 본능의 감으로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만일 사람처럼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가졌다면, 생고기를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오직 푸줏간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파에몬의 개' 라면 분명 상황에 따라 본능에 충실한 나름의 합리적인 선택을 할 것이다.


이 논의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개와 인간의 본성은 다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쨌든 본능을 따르든 이성(理性)을 따르든, 그것이 옳든 그르든 선이든 악이든 간에 모든 선택과 결정에는, 항상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푸줏간의 개를 언급한 고병권 선생의 심정이 적어도 내게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본능에 따르는 개로 살아가든, 자유로운 영혼의 인간으로 살아가든지 간에,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똑같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가 없으면 욕망은 고통일 뿐이다.


이성과 도덕, 그리고 본능과 욕망 사이에서


어쨌든 세 경우의 개 이야기 속에는 공히 '내적 갈등'이 그 중심에 있다. 그래서 특별한 이야기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여실히 드러나는 그 갈등의 중심에는, 차마 스스로 거부하기 힘든, 성취되지 못한 개인적 욕망 내지는 욕구라는 것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들다. 따라서 인간이 처한 가장 현실적인 문제 또한 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 점에서 세 유형의 개(dog) 이야기는 다분히 철학적이다.


상황적으로 수동적인 것과 능동적인 것의 차이를 떠나서, 내게 닥쳐진 현실 앞에서 용기가 없으면 어떤 형태로든 내가 갖고 있는 '욕망'이 바로 '고통'이다. 그것이 때로는 사람을 비참하게 때로는 초라하게 때로는 비굴하게 만든다. 자신의 내면에 감추고 있는 욕망을 용기를 통해 적절히 발산하고 그것을 성취하거나 제대로 통제하지 못할 때, 자칫하면 상갓집이나 푸줏간 앞의 '개'가 될 수밖에 없다. 때로는 파에몬의 개처럼 이성적 혹은 도덕적 판단의 대상, 혹은 자기 합리화의 근거로 전락해 버리기도 한다. 이는 참으로 모순으로 가득 찬 인간의 적나라한 실상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사람이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개가 된다면, 그러한 갈등과 고민은 일거에 사라진다. 그러나 사람은 개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기 때문에 현실과 욕망, 욕망과 용기, 용기와 양심 사이에서 끝없이 갈등하고 고민하는 것은 일상적인 경험이다. 조지 오웰은 다음과 같이 통찰한 바 있다. " '속물근성'이란, 다른 모든 사람에게서는 확인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만큼은 예외인 악덕이다."('위건부두로 가는 길')


솔직히 말해서, 나는 욕망과 이성, 그리고 욕망과 양심 앞에서 언제나 갈등한다. 나는 욕망 앞에서, 그것이 풍요든 쾌락이든 자유든 간에, 내 이성과 양심이 언제나 당당하게 이기지는 않는다. 대부분 욕망을 그대로 간직한 채, 그냥 포기하거나 주저앉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언제나 내게 부족한 것은 욕망의 갈등을 뛰어넘는 용기다. 욕망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새 고통으로 변하여, 내 안에 점점 더 쌓여간다.


선한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는 용기


"창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통으로부터의 위대한 구원이며 삶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창조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고통과 많은 변신이 필요하다." -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신념이 무언가 잘못된 것을 깨닫고, 자기 삶의 올바른 변화를 위한 선택과 실행의 결단은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이러한 점에서 독일 영화 '타인의 삶'(2006)은, 용기에 관한 생각의 단서를 제공해 주는 좋은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은 동독의 악명 높은 국가보위부(슈타지)의 냉혈한 심문관이요, 요주의 인물의 비밀 감찰업무를 담당했던 비슬러 대위라는 비밀경찰이다. 그는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이 오직 국가와 당에 충성하는 냉혹하고 냉철한 인물이다. 독일이 통일되고 우체부로 일하던 비슬러는 우연히 서점에서 자신이 감시 감찰하던 소설가의 책을 발견한다. 거기에서 소설가가 자신을 감시하던 비밀경찰에게 바치는 감사의 마음을 담은 헌사를 발견하고 곧바로 책을 구입한다. 서점 직원이 "선물 포장해 드릴까요?"라고 묻자, "아니오, 이 책은 나를 위한 겁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진심과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음을 인지한다는 것은, 정말 가슴 벅차오를 정도로 감동적인 일이다. 역설적으로 그야말로 고해와 같은 세상을 어떠한 고통을 무릅쓰고라도 능히 살아갈 만한 큰 이유가 되는 것이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자는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남자를 위해 화장을 한다." 사기(史記) 자객열전에 나오는 자객 예양의 고백이다.


삶은 그야말로 선택을 위한 숱한 갈등의 연속이다. 그러한 갈등 속에서 선택과 결단은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 '개'처럼 사는 삶을 선택하는 것도, 보다 나은 인간의 삶의 선택하는 것도 오롯이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제아무리 '똑똑하고 용감하다' 자부할지라도, 사람이 꼬리치며 이리저리 눈치 살피는, '개'처럼 비굴하고 구차하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리 '똑똑하고 용감하다'해도 개는 개일뿐이다. 다시 생각건대 삶에서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고통이고 또 선택이라면, 이왕이면 구차하게 애써 자기 합리화를 하는 수고가 필요 없고 양심의 고통 또한 없는, 보다 인간적이고 떳떳한 삶을 선택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또 어차피 변화해야 한다면, 이왕이면 선한 영향력으로 보다 선한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는가? 


영화 '타인의 삶'에서 비슬러 대위가 보여준 진정한 용기는, 때론 상갓집의 개처럼, 때로는 푸줏간 잎의 개처럼, 때로는 무기력한 관찰자로서 지금-여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내게, 은근한 경고와 함께 숙제 하나를 던져 준다. '파에몬의 개' 딜레마 또한 그렇다. 이성과 본능, 그 앞에서 용기는 내가 평생 풀어야 할 숙제다. 나는 '개띠'다. (202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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