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허튼소리

비극의 탄생

by 파르헤시아

"내가 아무것도 바랄 수 없는 곳, 모든 것이 너무나 명백하게 종말을 가리키고 있는 곳에 희망을 걸었다는 것!"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박찬국역/아카넷 2007)


우리는 흔히 마음을 아프게 하는 슬프고도 비참한 사건이나 일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이구동성으로 ‘비극(悲劇)’이라고 표현한다. 연극의 한 형태인 비극(悲劇)도 동일한 용어를 사용한다. 연극에서의 비극이란, 인생을 소재로 하여 불행한 결말을 맺는 극(劇)의 한 형태다. 비극의 반대는 '희극'인데, 희극은 인생이라는 동일한 소재로 하되 비극과는 반대로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 시인 바이런은 비극과 희극을 간단명료하게 구분한다. 즉"결론이 죽음으로 끝나면 비극, 결혼으로 끝나면 희극"이라는 것이다.


좀 더 확장해 보면 비극은 죽음, 파멸, 패배, 숙명, 인간의 한계, 진지함(성찰과 반성) 등등의 개념이 연관되고 희극은 재생(새 생명의 탄생, 변화된 삶), 결혼, 축제, 번식, 환희, 등등이 연관된다. 이해를 좀 더 돕기 위해 개인적인 사족을 덧붙이자면, '갈등이나 문제 혹은 비극을 야기하는 결점이나 한계 등이 극복되지 못하고 미해결의 상태로 끝나면 비극', '극복하거나 해결되면 희극'이다. 대부분의 비극이 죽음으로 끝마치는 이유는 비극을 야기하는 문제와 갈등 혹은 결점을 끝내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네카는 ‘인생은 한 편의 연극이다. 그 길이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연기하느냐에 달려 있다.(Life is a play. It's not its length, but its performance that counts.)’라고 말했다. ‘인생은 연극’이라는 세네카의 말을 두고 좀 더 숙고해 보면, 우리네 인생 자체가 곧 한 편의 비극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인생에서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생을 연극이라는 하나의 큰 카테고리로 본다면 인생은 곧 죽음이라는 인류공통의 결말을 향해 전개되는 비극이며, 희극은 그 대단원 속에 포함된다. 희극은 비극의 지엽적인 부분이라는 말이 되겠다.


문화와 예술 그리고 학문으로서의 비극은 대략 2500(기원전 5~6세기)여년 전 고대 그리스로부터 유래한다. 그리스 비극은 새로 담근 술통을 따는 봄의 대축제(디오니소스 축제)에 상연되었다. 그리스 신화와 영웅들을 소재로 하여 신과 인간의 대립과 갈등을 통하여 장중한 드라마를 전개한다. 그리스 비극은 신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 내면의 성찰과 탐구를 이끌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완성에 기여하였고 동시에 서양 연극의 원류가 되었다. 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을 통해 학문적 이론으로 집대성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은 역사보다 철학적이고 주변 사람들보다 뛰어난 인물을 등장시켜 공포와 비애를 일으킴으로써 카타르시스에 이르게 한다”라고 정의했다. 카타르시스 (catharsis)란, 심리학적인 용어로 ‘자기가 직면한 고뇌 따위를 외부에 표출함으로써 정신의 안정이나 균형을 찾는 일(자기 정화)’을 의미한다. 즉, ‘비극을 감상함으로써 마음속에 억압되어 있던 감정이 해소되고 마음이 정화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간파했다. 근세에 와서 비극을 철학적으로 다시 분석한 이는 니체다.


니체는 그의 첫 저서 ‘비극의 탄생’을 통해서 그리스 비극이 탄생한 요인으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갈등과 결합에 의해 탄생한 것으로 보았다. 니체에 의하면 아폴론적인 것을 대표하는 것은 이성이요,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광기다. 쉽게 말하자면, 인간 내면의 진지한 탐구와 성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기는 이성의 독자적인 행보가 아니라 이성이 광기와 서로 만나 융합하는 지점에서 시작되었다고 본 것이다. 상식적으로 이성과 광기는 서로가 대립되는 아주 이질적인 개념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는 신들의 왕 제우스의 아들들로 아폴론은 태양의 신, 예언 및 광명, 의술, 궁술, 음악과 시를 주관하는 신이다.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 풍요와 생육의 신이다. 아폴론적인 것이라는 말은 빛, 조화와 균형, 절제와 질서, 이성과 지식, 안정, 등등 태양과 연상되는 이미지들을 상상하면 된다. 반면에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말은 도취, 축제, 극단성, 일탈, 무질서, 본능, 광란, 환상, 열광, 희열 등등 술과 번식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들이다. 아폴론적인 것은 눈에 보이는 균형과 조화, 절제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조형예술의 총화라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비조형적인 예술인 음악의 총화다. 아폴론적인 것이 이성이 지배하는 세계라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광기가 지배하는 세계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이성(理性)이란, '이치(理致)에 따라 사리(事理)를 분별(分別)하는 성품(性品)'으로 합리적(合理的) 사유능력(思惟能力)을 말한다. 이러한 이성, 즉 이치에 따라 사리를 분별하고 그 준칙에 따라 행위하고 사유하는 능력은 인간을 동물과 구분하는 중요한 지표로, 보고 듣고 느껴서 아는 감각(오감, 혹은 직관, 오성)과 구별되는 것이다. 즉 이성은 사유하는 능력뿐만이 아니라 그 사유의 결과로 합리적인 원리원칙에 따라 행위하게 하는 능력이다. 관념론 철학자들에 의하면 이성은 개념적이고 논리적 인식능력인 오성에 의해 체득된 개념들을 원리원칙적인 것으로 다시 체계화하는 상위의 능력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아무리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지식이 행위원칙으로 체화되지 않고 인간의 행위에 올바르게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삶의 준칙으로는 이성적인 결함이 있다는 말이 되겠다.


광기(狂氣)는 말 그대로 미친 것과 관련된다. 사전적으로는 ‘미친 듯한 기미, 미친 듯이 날뛰는 기질’로 현대에 와서야 학문적으로 정신장애와 같은 정신병리학적인 질환으로 정착되었다. 광기에 대해서 역사. 문화, 사회철학적으로 고찰한 사람은 미셀 푸코다. 광인은 정상인과 구별하기 위한 사회 통념적 개념이다. 이성이 정상으로 구별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광기에 대한 인식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광기는 환각, 망상, 때로는 배제되어야 할 악의 본질로, 또는 금지된 지식, 신성한 광기 등의 신성한 영감이나 지식의 악마적 형식으로 간주되거나 자연법칙의 위반, 즉 자연에 반하는 야수성과 연관되었다. 18세기말에 와서야 광기를 정신착란현상으로 간주하였다.


푸코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광기의 역사를 고찰하면서도 정작 광기의 개념적 정의에 대해서는 ‘부재한 것’, 즉 개념적 정의를 내리지 않고 정상적인 개체군과 미친 개체군을 일종의 변수에 따라 종속적인 것의 값이 달라지는 관계함수적인 개념으로 보았다. 이에 대해서 프랑스의 철학자며 문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는 "푸코는 광기를 결코 정의하지 않는다. 광기는 그 역사를 재발견해야 할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광기는 인식 그 자체다. 요컨대 광기는 병이 아니라, 세기마다 이질적일 수 있는 가변적 의미이다. 미셸 푸코는 광기를 함수적 현실로만 다룬다. 광기는 푸코에 있어서 이성과 비이성에 의해 형성된 커플의 순수 함수이다"라고 쓰고 있다.


푸코의 고찰에 의하면, 근대사회에서 광기를 다루는 방법은 사회 권력이 대중을 통제하는 감시와 사회적 배제라는 광범위한 현상의 한 특징으로 사회적 낙인, 사회통제와 연관된다. 즉, 광기를 가진 사람이 정신병리학적으로 정신장애 혹은 정신질환으로 판정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의 말과 행위는 일체의 의미가 배제된 정신질환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대화와 소통자체가 원천적으로 차단되고 그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오직 진단과 치료의 근거로만 처리된다.


역설적으로 체제에 의해서 광기 즉, 체제가 인정하는 정상인과 구별되는 광기로 권력에 의해 진단되는 대상은 격리되고 배제되어야 할 대상으로 모든 인간적인 소통과 대화가 단절되는 것이다. 소위 낙인 효과다. 낙인효과는 집단뿐만 아니라 개인과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잭 니콜슨의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정신병원이라는 통제되고 닫힌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인간성이 쉽게 말살되는지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이러한 현상은 현실적인 것으로, 소통 상대자의 시각이 어떠한 시각과 인식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원천적으로 대화나 토론 자체가 아예 안 되는 사회심리학적 논거를 제공해 준다. 실제로 최근의 뇌과학이 입증한 자료에 의하면, 동일한 현실인식을 놓고도 보수적인 사람과 진보적인 사람의 뇌가 다르게 반응하며 활동하는 부위가 다르다고 한다. 구조적으로 대화 자체가 통하지 않는 상태라면, 일말의 소통이나 공감도 전혀 기대할 수가 없다.


문제의 본질을 직면하고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고 고뇌한 햄릿을 결국 미치게 한 광기는 비극의 정점을 이룬다. 이러한 비극이 전개되는 전 과정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지켜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자신을 돌이켜 관조하게 되고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를 탐구하게 하고 또 성찰하게 만든다. 이것이 카타르시스다. 니체와 푸코는 이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완성된 연극과 그것의 음악 사이에서 작용하는 예정조화에 의하여 연극은 언어연극이 보통은 도달하기 어려운 최고의 가시성에 도달하게 된다. 무대 위의 생생한 모든 인물들은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한 줄기 선율이 되어서 우리 앞에서 하나의 선명한 곡선으로 단순화된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여러 선들은 서로 얽혀서, 사건의 진행과 미묘하게 공명하면서 교체되는 화음으로 우리들에게 들려온다. 이러한 화음의 교체를 통해서 사물들의 관계가 우리에게 추상적인 방식으로 가 아니라 감각적으로 지각 가능한 방식으로 직접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우리는 또한 이러한 관계 속에서 등장인물의 본질과 한 줄기 선율의 본질이 순수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을 화음의 교체를 통해서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음악이 우리가 보통 때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내면적으로 보게 하고 무대 위의 사건을 섬세한 직물처럼 우리 앞에 펼쳐지게 하는 동안에, 내면을 들여다보는 우리의 정신화된 눈에게 무대의 세계는 무한히 확대되는 동시에 내면으로 비추어진다.”(니체, 비극의 탄생)


이러한 차원에서 니체는 비극의 근원을 디오니소스적 정신에서 찾음으로써 디오니소스적 광기를 더 높이 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경험의 결여나 둔감 때문에 자신은 건강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러한 현상들을 '민중들의 병'으로 치부하고 조소하고 경멸하면서 그것들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이 불쌍한 사람들은 디오니소스적인 열광자들의 벌겋게 불타는 생명이 그들 곁을 요란하게 지나갈 때 자신들이 자랑하는 '건강성'이 얼마나 시체처럼 보이고 유령처럼 보이는지를 느끼지 못한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마력 아래서는 인간과 인간의 결합만이 다시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소외되고 적대시되어 왔거나 억압되어 온 자연도 자신의 잃어버린 탕아인 인간과 다시 화해의 축제를 벌이게 된다...... 이제 노예는 자유민이다. 이제 곤궁과 자의 혹은 '뻔뻔스러운 작태'를 인간들 사이에 심어놓은 완강하고 적대적인 모든 제한이 파괴된다. 세계의 조화라는 복음 속에서 사람들은 이제 이웃과 결합하고 화해하며 융합하고 있다고 느낄 뿐 아니라, 마야의 베일이 갈기갈기 찢어져 신비로운 근원적 일자 앞에 펄럭이고 있는 것처럼 이웃과 하나가 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니체, 비극의 탄생)


니체는 광기 그 자체를 찬양한 것이라기보다는 디오니소스적 광기를 통해서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극복하는 과정과 진리를 찾는 방법을 추구하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지점에서 문자적으로 호도된 쾌락주의 혹은 문자적 의미의 광기와 이성과 갈등을 일으켜 자신의 본질을 관조하게 하는 디오니소스적인 창조적 광기와는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니체는 소크라테스주의, 이성적 논리적 변증법에 입각한 철학사조에 의해 디오니소스적인 광기의 정신이 말살되었음을 한탄하였다.


완벽하고 절제되고 조화로운 아름다움에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경외감이 든다면, 다소 빈틈이 있더라도 불완전한 것들에는 동질감 내지는 은근한 친근감을 느끼는 법이다. 여러모로 결점과 빈틈이 많은 나는 종종 아폴론적인 이성보다는 디오니소스적인 광기를 꿈꾼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완벽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동시에 완벽하게 행복한 인생은 없다. 또한 완벽하게 불행한 인생 또한 없다. 인생 그 자체가 비극인 그 속에 희극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희망이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희망이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


빛, 조화와 균형, 절제와 이성, 질서와 안정으로 대변되는 아폴론적인 조형미와 아름다움이 강조되고 앵무새처럼 도덕적 생활을 요구하면 할수록 그러한 정신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오히려 경직되고 이율배반적이고 강박적인 비인간적 통제사회로 흘러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암흑시대를 거쳐 온 인류역사를 통해 이는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인류의 문화와 인간의 내면을 자유롭고 풍요롭게 만든 것은 오히려 아폴론적인 정신이 이단시한 디오니소스적인 정신이다. 디오니소스적 광기가 부러워지고 절실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불완전한 인생 그 자체가 곧 비극이라면, 디오니소스적 광기를 통해서 비극을 관조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고, 사유하는 능력, 즉 이성과의 조화를 통하여 그 돌파구를 찾아 갈등과 결점을 극복하고자 하는 사유의 노력은 무엇보다도 절실한 것이 되겠다.


18세기 영국의 작가 호레이스 월풀은, "세상은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고 느끼는 자에겐 비극"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왕이면 비극보다는 행복한 결말이 맺어지는 희극이 좋지 않겠는가.


“삶은 고해(苦海)다. 이것은 삶의 진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진리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삶은 더 이상 고해가 아니다. 다시 말해,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이를 이해하고 수용하게 될 때, 삶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삶이 고해임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삶의 문제에 대해 그 해답을 스스로 내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스캇펙, ‘아직도 가야 할 길’)


요즘 사회현실은 현실에 맞춰 적절하게 미치지 않고서는 제대로 살 수 없을 것만 같다. 요즘은 들리는 소리들이 대부분 분노만 남고 관조의 기회가 아예 박탈된 문자 그대로의 비극적인 것들이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러한 비극이 사소하게만 보이는 주변의 여러 희극들을 압도한다. 나는 언제나 비극을 압도하는 희극을 상상해 본다. 비록 그것이 사소한 것일지라하더라도...... 뜬금없는 정신 나간 소리 같겠지만, 비록 희망사항일지라도 인생자체가, 현실 그 자체가 비극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마다 나도 때로는 돌파구를 찾아 광기에 휩싸이고 싶은 적이 종종 있다. 때로 갈등의 문고리를 붙들고 서성대고 있을 때, 영원한 자유인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대목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당신 책을 한 무더기 쌓아놓고 불이나 확 싸질러 버리쇼. 그러고 나면 누가 압니까? 당신이 바보를 면할지?"(20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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