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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로칼랭 Jun 21. 2020

자살, 산 자의 고독

# 죽음  # 삶


사랑하던 사람이 스스로 떠났다

그 선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첫 번째 기억은 '흔적'에서였다.

교회 청소년부에서 나를 좋아해 주는 친구의 곁에는, 그 친구를 좋아하는 또 다른 아이가 있었는데 항상 손목을 밴드로 감고 다녔다. 패션으로 손수건을 감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 그게 그 아이의 멋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 아이의 손목에 감춰진 붉은빛이 '자살 흔적'이라는 것을 알게 됐는데 그 흔적이 선명하게 보일수록 왠지 모르게 숙연해졌다.  


나는 궁금하지 않았다. 아니, 궁금해서는 안될 것 같았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두 번째 기억은 '도움 요청' 같은 거였다.


대학교 여름방학, 폭염이 지속되던 어느 날 전화를 받았다. 친구 언니였다.

 '내 동생에게, 가족들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라는 지친 목소리였는데 그냥 알 수 있었다. 내가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택시를 타고 친구의 집으로 갔고, 피를 흘리고 있는 언니를 봤다.

골목을 빠져나와 아무 남자를 붙잡아 도움을 요청했고, 택시를 잡고 병원에 갔다.

사람을 살렸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었지만 가족들은 냉담했다. 내가 병원 원무과에 환자 상태에 대해 '자살시도'라고 정직하게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자살은 보험이 되지 않는다는 친구의 어색한 변명을 듣게 되었다.


뒷걸음쳐 그곳을 빠져나왔고, 더디게 가는 하루를 조용히 보냈다.






그리곤 너무 늦은 이야기들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을까. 어학연수를 갔던 친구가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전화를 했다. 그리고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 이유가 '동생이 우리 모두를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도 곧 알게 됐다.

우리 모두는 불안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고 위안하고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고 며칠 지난 뒤, 나는 용기를 내서 친구 부모님이 계시는 시골집을 찾아갔다.

엄마가 쓰러질까 며칠 와서 지낸다는 친구를 핑계로 무작정 찾아가 점심을 얻어먹었다.

친구의 염려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라도 밥을 함께 먹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위로의 전부이기도 했다.


내 마음을 알아준 친구는 고맙다고 했고, 난 하루를 더 자고 돌아왔다.

삶이 무엇인지도 다 알지 못했던 그때, 죽음이 남기는 강렬한 상실을 경험한 것이다.






가을이 시작되던 어느 날이었다.


큰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빈소가 있던 충남 당진으로 내려갔다.

원래 몸이 좋지 않으셨지만 갑자기 돌아가신 게 이해되지 않아 엄마 곁으로 가서 조용히 물었다. 엄마는 손짓을 하며 나를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큰엄마 아파서 돌아가신 거 아니다.”

 “그럼, 왜? 사고였어?”

 “아니, 농약 드셨어.”

 “!”     

 “큰아버지 먼저 가시고 힘들어하셨잖아.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네. 지난번에도 자살하려고 했는데, 그땐 빨리 병원에 모시고 가서 괜찮으셨대.”

 “아! 알았어. 알고 있을게.”


그제야 상주들 얼굴이 다시 보였다. 사촌 오빠와 사촌 언니. 남은 가족들의 표정을 살폈다. 원망과 슬픔이 교차된, 절망에 점령당한 얼굴이었다.


자식들이 서울로 모시고 와도, 되돌이표처럼 제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던 큰엄마. 나는 상상도 하지 못할 외로움과 싸웠을 수많은 날을 상상하니  가슴이 저렸다.  눈치도 채지 못하고 살았던 내 평온한 생활들이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그리고 나보다 더 강렬한 후회 속에서 눈물을 참고 있는 오빠들과 언니가 보였다.



생각조차 못한 상실이 일어났다. 그것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혀 이성을 마비시키고 극심한 고통을 맛보게 한다. 누구든 살아가면서 많은 상실을 경험하지만 사랑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공허감과 깊은 슬픔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다. 당신의 세계는 그대로 멈춰버린다.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상실 수업> 중에서



사랑하는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비통한 상실에 빠져 살던 큰 엄마는 그렇게 절망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그 비통함을 자식들에게 똑같이 남기고 떠났지만, 자식들은 엄마를 원망할 수도 없다.


 “언니. 미안해. 내가 너무 몰랐네요.”


엄마를 잃었지만 죽음을 마냥 슬퍼할 수도, 또 엄마를 원망할 수도 없는 그 심정이 어떨까. 큰엄마의 제일 맏딸인 언니 옆에 가서 서툰 위로를 건넸을 때, 언니는 웃으며 대답해줬다.


 “뭘 미안하냐. 우리 사는 게 다 똑같지. 괜찮아. 뭐 좀 더 먹어.”     


손님들이 거의 떠나고, 발인을 몇 시간 앞둔 새벽에 언니가 나를 불렀다. 편하게 쉴 장소를 찾다가 주차장으로 가서 내 차에 함께 누웠다.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누워 오지 않는 잠을 청하는 척했다.


 “내가 여동생이 없잖니. 편하게 말하고 싶어도 그게 안 되네. 아들들은 성질만 앞서고.”

 “처음 시도했던 게 아니라면서. 나는 그것도 몰랐네, 언니. 미안해.”

 “아버지 가신 건 가신 건데, 자꾸 죽겠다고 하고 힘들다고 하고. 원망만 하시니까 답이 없지. 우리가 모시려고 해도 시골집 떠나 못 살겠다고 하시니까.”

 “그래서 오빠네 집에 계시다가 다시 내려가신 거야?”

 “그래. 고집부려 내려가더니 저렇게…….”

 “언니 잘못한 거 없어. 언니. 그냥 편하게 보내드려. 큰아버지 곁으로 가고 싶으셔서 그런 거잖아.”     


발인을 끝내고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이 엉키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선택적 죽음'을 잘 받아들이는 방법이, 과연 있기는 한 걸까.

삶은 계속되지만, 정작 왜 이렇게 우리가 이 삶을 살아나가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죽음을 연구하면

이 보일까



여기 한 여자가 있다.

세 쌍둥이의 첫째로 태어난 그녀는 똑같이 생긴, 하지만 전혀 다른 두 자매를 바라보며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우리는 모두 똑같이 생겼으나 전혀 다른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같은 질문.


그녀의 사유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버지 친구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은 것을 목격한 뒤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을 학문적으로 이해하고 싶어 대학에서 정신의학을 전공하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자기가 알게 된 병원 의사들이 환자를 대할 때 인격이 아닌 '심박수'나 '폐기능' 같은 신체 기능으로만 평가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반감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런 경험은 그녀를 다른 세계로 이끌었다. '의미 있는 죽음'이라는, 조금 낯선 운동을 시작하게 됐다는 그녀는 세계 최초로 호스피스 운동을 펼쳤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다.


엘리자베스는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대상으로 정신과 상담 진료를 하면서 '어떻게 죽느냐'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그 경험을 토대로  '상실'에 대한 메시지를 전했다.



오직 하나의 상실을 두고 슬퍼할 수 없다. 사랑한 이를 잃었지만 그 슬픔은 과거와 현재에 일어났던 모든 상실들을 생각나게 한다. 과거의 상실들은 전에 일어났던 누군가의 죽음이다. 현재 당면한 상실들은 가장 최근의 상실이 남기고 간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삶 속에서 순응해야 할 모든 변화들을 말한다.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상실 수업> 중에서




    


여기 또 한 여자가 있다.

방송에서 만난 열일곱 살의 춘미는 탈북자의 딸이었다.


춘미 엄마는 북한에서 탈출하기 위해 강을 건넜지만 중국 국경에서 기다리던 인신매매단에게 붙잡혀 비루한 삶을 살았다고 했다. 그렇게 팔려간 곳에서 출산하게 된 것이 춘미였다.

춘미는 보따리 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엄마가 견디지 못하고 한국으로 다시 도망쳤을 때 - '엄마가 돈 모아서 비행기표 끊어주면 그때 한국으로 와!'라는 말을 믿고 기다리며 외로운 삶을 살았다.


몇 년 뒤 춘미는 그토록 그리던 엄마가 사는 한국에 오게 됐지만, 엄마와 함께 살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탈북자를 위한 쉼터 같은 곳에서 공동생활을 하던 어느 날, 춘미는 엄마를 찾아가 투신자살을 시도했다. 다행히 빠르게 발견한 엄마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고 춘미는 극적으로 생명을 지키게 됐다.

의사들은 살아난 것만도 기적이기 때문에 전신마비가 되어도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지만, 춘미에겐 '더 큰 기적'이 찾아왔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 어느 꿈속에서 금빛 왕관을 쓴 남자가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한다'라는 말을 전해주었을 때 - 춘미는 자신의 인생에도 기적이 찾아오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다음 날, 춘미의 발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나 걸을 수 있었다.


춘미가 퇴원하던 날 카메라로 그녀의 삶을 취재하던 나는 춘미가 살던 쉼터의 작은 방에서 그림들을 보게 되었다. 2층 침대  좁은 1층. 춘미의 머리맡에서였다.  


작은 침대 벽에는 그림을 배운 적도 없다던 춘미의 그림들이 낙서처럼 붙어 있었는데, 그중에 가장 시선을 잡아 끄는 그림이 귀가 잘린 고흐의 자화상 모사였다. 

스스로 귀를 잘라낸 고흐의 자화상을 따라 그렸을 그 어느 , 열일곱 어린 춘미의 슬픔을 마주하는 것 같아 눈물이 났다.


나의 방송에 출연한 뒤 춘미는 미술 공부를 하러 미국에도 가게 됐다. 이것이 두 번째 기적이라고 사람들은 손뼉 쳤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그날의 기적이 여전히 심장을 지배하고 있는지 가끔 간절히 궁금해진다.

 

가끔 문자로 안부를 물을 뿐, 서로의 삶을 잘 알지 못하는 우리이기에 - 오늘도 미가 그날의 기적을 인생의 기적으로 만들어가길 소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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