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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로칼랭 Jul 06. 2020

코로나가 빼앗은 '평범한 일상'


 "언니, 나를 만나도 괜찮겠어? 우리 서로 탓하는 일 없기로 해!"


가까이 살면서도 자주 만나지 못했던 우리는 코로나로부터 자신이 오염됐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전면에 내놓고, 이런 우스갯소리로 약속을 잡았다.  지나치게 강한 다짐을 담은, 굳건한 약속이었다.


안부 문자를 보내고 통화도 했지만 약속을 잡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거주지가 '피해자 속출'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 달만의 만남이라 들떠서 먼저 나와 기다렸는데 동생이 모자를 벗어 구기며 투덜거렸다.


 "너무 덥다."

 "그러게. 너무 덥네. 벌써 여름이야.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지?"


계절이 몇 번 바뀌는 사이에도 우리는 도망자처럼 집에 숨어 지냈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외출과 늦은 밤의 산책과 같은 - 이전에는 생각한 적도 없는 새로운 삶의 패턴을 이야기하던 중에 문득 동생이 말했다. 


 "그중에서 가장 미치겠는 건, 내 평범한 일상이 사라져 버렸다는 거야."


툭 뱉은 말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동생은 이제 네 살이 된 어린 딸을 키우고 있었다. 

올해 공립 유치원에 가게 됐다고 좋아했던 게 몇 달 전인데, 코로나 때문에 발목이 잡혔던 거다. 

가끔 하는 아르바이트 원고 쓰기를 빼면 고스란히, 딸과 함께 집에서 지냈을 동생이었다. 


 "엄마 가끔 오시잖아. 맡기고 어디라도 가!"

 "어디? 어디!"


마음을 풀어주고 싶어 대답을 했지만 나도 알 수가 없었다. 

갈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언니 누가 그러는데, 자유롭게 여행하던 시절은 이제 끝났대. 우리 세대가 마지막이라는데. 이제 어떡해?"


 '겨울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봄을 넘기는 않을 거야.'  이런 막연한 기대로 몇 달을 버텨왔던 우리는 이렇게 대책 없는 내일의 절망을 속수무책 받아들여야만 했다. 


코로나바이러스 19가 지상을 장악한 이후, 우리 모두는 일상을 빼앗겼다.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했고, 집에서 끼니를 거의 해결한다. 

공연장에 가는 일이 두렵고, 콜라와 팝콘을 들고 영화를 보는 일도 할 수가 없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누군가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일도 머뭇거린다.


우리가 먹고 있는 평양냉면만큼이나 밍밍한 하루들.

서로에게 어떤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문득 한숨이 났다. 


 "제일 힘든 게 뭐야? 여행 못 가는 거?"


 나의 질문에 동생은 고개를 들었다. 


 "뭐랄까, 그냥 허. 송. 세. 월. 하고 있다는 생각? 시간은 나는데 뭘 하고 사는 건지 모르겠어."


동생의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닐까 눈을 힘차게 깜박였다. 아무리 다시 보아도 예상 못했던 슬픈 눈이었다.


 "울지 마. 울지 마~!"


난 장난스럽게 말하며 동생의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봤다.






소년은 아빠와 함께 걷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방수포와 식료품 몇을 넣은 배낭을 메고 둘은 남쪽을 향해 가고 있다. 

세상은 잿빛으로 변했고 바다가 '파란색'이라는 것도 잊어버린 채 - 그들은 길을 걷는다. 

소설 <더 로드>의 이야기다. 


<The Road>  Cormac McCarthy  /코맥 매카시


내가 보았던 소설 중에서 '가장 절망적인' 이 이야기에는 시작도 끝도 없는 생존의 기록이 담겨 있다. 

'어떤 재난'의 상황에 빠져 버린 아버지와 아들은 '불을 지키기 위해' 남쪽으로 가고 있다. 

아버지의 가장 큰 걱정은 신발과 먹을 것. 그리고 오늘 밤을 살아내는 일이다. 


언젠가, 이들에겐 스스로 목숨을 끊을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잔인한 고통 속에서 살아있다는 것을 후회해야 할까?


제말 이러지 마, 무슨 일이든 할게

뭘 할 건데? 이건 오래전에 했어야 할 일이야. 총에 총알이 두 알이 아니라 세 알 있었을 때. 내가 어리석었지. 이미 다 끝난 일이었어. 나 스스로 여기까지 온 게 아니야. 끌려왔지. 하지만 이제 됐어. 당신에게도 얘기하지 않으려고 했어. 그게 더 나았을 텐데. 당신에게는 총알이 두 알밖에 없어. 그런 다음에는 어쩔 거야? 당신은 우리를 보호할 수 없어. 당신은 우리를 위해 죽겠다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 당신만 아니라면 쟤도 데려갈 거야. 내가 그럴 수 있다는 걸 당신도 알잖아. 그게 옳은 일이야. 


<중략>


죽음은 애인이 아냐

아냐 애인이야

제발 이러지 마

미안해

- 코맥 매카시 <더 로드> 중에서 



생존의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어 질 때가 있다.

고통스러운 질병과 싸울 때도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살아 있다는 것이 고문과 같이 느껴지는 사람들은, '새로운 애인'을 찾아 떠나고 싶은 것이다. 


여자는 남자와 이 대화를 끝으로 이들을 떠났다.

남겨진 남자는 소년을 데리고 다시 떠나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다시 걷고, 또 걸었다. 어둠 속에서 빛을 기다리고. 생존을 위해 먹을 것을 찾아 헤매면서. 

죽음의 위기에서 겨우 살아난 남자가 소년에게 말을 건넸다. 



영화  'The Road', 2009 / 존 힐코드 감독


이야기 하나 해줄까?

아뇨.

왜?

소년은 남자를 보다가 눈길을 돌렸다.

왜?

그런 이야기는 진짜가 아니잖아요.

진짜일 필요는 없어. 이야기니까.

그래요. 하지만 그런 이야기에선 우리가 늘 사람들을 돕는데 실제론 안 그러잖아요.

그럼 네가 이야기를 해줄래?

하고 싶지 않아요.

알았다.

할 이야기가 없어요.

너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 되잖아.

제 이야기는 이미 다 아시잖아요. 옆에서 봤으니까.

네 속에는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어.

꿈같은 거요?

꿈같은 거. 아니면 그냥 네가 생각나는 거.

네. 하지만 이야기는 행복해야 하잖아요.

꼭 그럴 필요는 없어.

아빠는 언제나 행복한 이야기만 해주시잖아요.

너한테는 행복한 이야기가 없니?

우리가 사는 거하고 비슷해요.

하지만 내 이야기는 안 그렇고.

네, 아빠 이야기는 안 그래요.

남자는 소년을 살펴보았다. 

우리가 사는 게 아주 안 좋니?

아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 나는 그래도 우리가 아직 여기 있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 안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지만 우린 아직 여기 있잖아. 

- 코맥 매카시 <더 로드> 중에서 




우리의 삶은 바뀌었다.

코로나바이러스 19가 전 세계를 침범하기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이다.

원하는 곳에 갈 수 없고, 낯선 미지의 공간은 금기가 됐다.

우리의 삶은 통제되고 있고, 통계 안에 들어왔다. 감시 속에 살고 있다.


어쩌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삶의 질서를 다시 만들어가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동생에게 다시 묻고 싶다.


"우리가 사는 게 아주 안 좋니?"

 

동생이 나에게 언니는 어떠냐고 물어봐 준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그래도 우리가 아직 살아있다는 게 중요하잖아. 안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지만, 우리는 이렇게 만날 수 있잖아. 대화할 수 있잖아." 


많이 불편하지만 '할 수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살아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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