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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로칼랭 Jul 13. 2020

죽음을 막아내려는 너에게



원래는 오빠의 친구였지만, 언젠가부터 나에게도 친구가 되었던 오빠 친구.

고등학교 시절 교복을 입은 채로 처음 인사했던 그는 긴 세월 나에게 먼저 인사했다.

내가 병원에 입원하면 찾아와 친오빠 흉내도 냈고, 쓸데없는 말장난을 섞어 안부를 묻기도 했다.

늘 먼저 전화했고, 먼저 안부를 물어줬고, 밥을 사주고, 차를 사주던 사람이었다.

친구였다고 했지만 언제나 손해 보는 건 그였다.


그의 전화가 온 것은 늦은 오후였다.


"오빠 안녕? 잘 지내요?"


늘 그렇듯이 짜인 듯이 평범한 나의 인사.

하지만 대답은 달랐다.


"오빠 잘 못 지낸다. 너 어디니?"

"왜 못 지내? 난 똑같지. 오빤 어딘데."

"오빤 병원이지."


병원에서 일하던 사람이니까 병원에 있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때, 그가 말했다.


"오빠 오늘 입원했다. 모레 수술해. 너 보고 싶어서 했어."

"왜? 어디 아픈데?"


늘 농담 섞인 인사만 하던 오빠가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난 걸음을 멈추고 길거리 어딘가에 서버렸다.


"말해 봐요. 어디 아픈 건데?"

"오빠 간암이란다. 벌써 말기야. 간 이식 수술하려고 입원했어."






열다섯에 수술을 하고 고등학교 시절 한 달에 한 번 병원을 찾아가던 나에게 그는 정말 든든한 위로였다.

책가방을 메고 교복을 입은 나는 그가 안내하는 대학 병원 어딘가에 있던 빈 방에서 잠을 자기도 했었다.

서랍에서 꺼내 주는 빵을 먹었고, 뛰어다니며 사주던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는 주는 사람이었고 나는 받는 사람이었지만, 왜 미안하지 않았을까.


"나 아이스크림 먹고 싶으니까 그거 사 와. 아니다 친구한테 사 오라고 하면 되니까 넌 그냥 와."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해보라는 나에게 그는 또 '빈손'을 주문했다.

병실에 들어가니 오빠의 친구라는 분이 가져온 카카오 프렌즈 캐릭터가 박힌 네모 박스 아이스크림이 잔뜩 쌓여있었다.  


"이걸 누가 다 먹어?"

"이거? 오빠가 다 먹을 거야. 걱정마라."


처음 보는 그의 친구와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었다.

수술 잘 받으라는 말을 남기고 친구가 떠난 뒤, 침대에 붙은 낮은 등을 켰다.


"오늘 혼자 자도 돼?"

"그럼 당연하지. 언니는 앞으로 힘들 텐데, 수술 전엔 쉬어야지."


모든 계획이 끝난 것처럼 단단한 대답이었다.


그리고는 그가 B형 간염 보균자였던 엄마의 모태에서 이미 감염되었다는 이야기부터, 평생 자신을 관리하며 살았다는 숨은 역사를 정리해줬다. 허리가 아팠지만 암이 생겼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다는 이야기는 남이 전해준 말처럼 낯설었다.


"그런데, 오빠가 정말 고민이 있어."

"그게 뭔데?"

"간 이식. 해도 될까....?"


이제 스무 살이 된, 대학 1학년이 된 아들의 배를 열고 거기서 간을 꺼내야 한다는 비극.

건강한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고민도 하지 않고 간 이식을 결정했지만, 그것을 거부하지 못했다는 나약함.

세상 누구보다 귀한 가족들에게 두 가지 고민을 한꺼번에 떠넘기게 됐다는 죄책감.


감정은 뒤엉켜 그를 흔들었고, 그가 울기 시작했다.


"............."


나의 어떤 위로도 힘이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함께 울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오빠. 울지 마. 지금 이럴 때야? 가족 생각해서 건강해질 생각을 해야지. 요즘 의학 기술이 얼마나 좋은데 아들 걱정은 안 해도 된다니까. 오빠가 잘 알잖아."

"잘 아니까 하는 말이다. 후유증이 생길 수도 있어."

"아냐. 확률 적어. 그런 거 걱정하면 아들이 좋아하겠어요? 이제 그런 생각 하지 말고, 나아질 생각만 해요. 응?"


우리는 옛날이야기를 나누며 몇 시간을 함께 보냈다.

교복 입고 병원에 다니던 내가 안타까웠다는 옛 시절의 이야기는 그에게 어느 정도 위로가 됐을까.

서로 말하지 못해도 아프며 살아가는 인생살이는 누구에게나 있다는 말은 약간의 용기를 남겼을까.


죽음에 임박한 환자를 만나고, 죽음과 싸우는 사람들을 만났으며, 죽음을 막아내려 애쓰던 그는 - 자신이 평생 일한 병원에서 죽음을 막아내기 위해 작은 침대에 누웠다.




죽음을 막아내려고 애쓰며 살던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죽음이 아닌, 사형수의 죽음에 관한 힘없는 싸움이었다.

텍사스 오스틴 대학의 철학과 교수였고 텍사스 사형제도 폐지 운동을 하던 '데스 워치(Death Watch)'의 회원이었던 사람 - 그는 영화  <데이비드 게일>의 주인공이었던 '데이비드 게일'이다.


<데이비드 게일> The Life Of David Gale, 2003 / 앨런 파커 감독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사형수가 됐다.

그것도 그의 가장 가까운 동료였고 친구였던, 데스 워치에서 함께 사형제도 반대 운동을 하던 콘스탄틴의 살해범이 된 것이다.


무죄를 주장했지만 통하지 않았고 텍사스의 법에 따라 사행을 언도받는다.

6년간의 수감 생활 후 사형 집행일을 며칠 앞두었을 때, 데이비드 게일(케빈 스파이시)은 자신의 변호사를 통해 언론 인터뷰를 요청하게 된다.


자신이 존경받는 저명한 대학교수였다가 대학생을 성폭행범으로 오해받게 된 사건의 이야기부터.

자신이 죽인 것으로 되어 있는 친구 콘스탄틴(로라 라니)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모두 꺼내놓는다.


데이비드 게일을 인터뷰하던 '빗시 블룸(케이트 윈슬렛)'은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그가 무죄이며 누군가의 음모로 누명을 쓴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되고 데이비드 게일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노력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데이비드 게일의 태도가 이해가지 않는다.

타인의 죽음을 막아내기 위해 싸우던 그가, 왜 자신의 죽음을 막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고, 그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

그런 그녀 앞에서 데이비드 게일은 이렇게 말해준다.


우리는 평생을 죽음을 막는데 소비하죠.

먹고, 발명하고, 사랑하고, 기도하고, 싸우고, 죽이면서요.

하지만 우리가 진짜 죽음에 대해서 뭘 알죠?

죽으면 아무도 안 돌아오죠.

하지만 인생에서는 어떤 순간이 닥치죠.

정신이 내면 깊숙한 욕망과 집착을 이기는 순간요.

당신의 습관이 이상을 이기는 순간요.

그 모든 걸 잃게 되면 그땐 죽음이 선물 같죠.

그렇지 않을까요?

- 영화 <데이비드 게일> 중에서






정신이 내면 깊숙한 욕망과 집착을 이기는 순간이, 습관이 이상을 순간이 과연 찾아올까?

만약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면 더 이상 죽음과 싸우지 않고, 막아내려 애쓰지 않을까?


오빠 친구였고 나의 위로자였던 그는 이제 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만난다.

잠깐 얼굴을 보고 밥을 먹는 것이 '죽음을 막아내는 힘'이 될까 봐.

힘없는 위로라고 해도, 나는 문자를 보낸다.


"오빠, 우리 밥 먹어야지. 내가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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