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 독립 편 -
취향을 찾아가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뭘까?
우선 소비를 많이 해봐야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 수 있게 되는 거 같다.
가끔은 감정적인 결정으로 실패 한 소비를 하게 되지만, 이런 실패 또한 나의 취향을 알게 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럼 소비는 언제 많이 하게 되는가?
나는 최근에 본가에서 독립하며 피부로 느낀 사실이 있다.
'독립하면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간다는 걸'
20대 후반이 가까워질수록 친구들의 집들이를 가게 되는 일이 잦아지면서 알게 모르게 독립에 대한 꿈의 씨앗이 무의식에 심어졌다. 그 씨앗이 발화된 결정적인 계기는 내가 지금 사는 이 오피스텔에 거주하고 있는 친구의 집에 방문한 것이었다. 평소 라이프스타일과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은 이 친구는 본인의 집구석구석을 자신의 취향으로 채워 나갔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에 대해 점점 확고해져 가는 모습을 봐왔다. 확고해져 간다고 해서 새로운 것들을 배척한다기보다는, 직접 구매하고 써보면서 구매 결정의 기반이 더 탄탄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케터 면접 질문 리스트 중 단골 질문이 있다.
'당신은 어떤 브랜드를 좋아하시나요?'
집에서 살 땐 내 돈 주고 살만한 물건이 의류 지출에 한정되었다.
음식을 직접 해 먹어 본적도 별로 없고 그렇기 때문에 주방용품 구매 같은 것은 나와는 먼 얘기였다. 의류 지출 이래 봤자 딱 내 나이대 맞는 브랜드의 재미없는 소비가 주를 이뤘다.
나이키, 코스, 폴로.
뻔하다. 제일 많이 소비하는 브랜드는 이 정도인데 면접에서 답변으로 이 브랜드들을 얘기하자니 너무 재미가 없다. 물론 답변을 위해 조금 각색해서 좀 더 재미있고, 개성 있는 답변을 준비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다. 만약 면접에서는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다고 해도, 마케터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다.
반면 내 친구에게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했을 때 자기는 요즘 '락앤락' 브랜드가 눈에 띈다고 얘기했다.
원래 '락앤락'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그냥 어마가 쓰는 플라스틱이나 유리 용기에 국한되어 있었는데, 최근에는 2030 라이프 스타일에 녹여들 수 있도록 변화를 많이 시도한다. 파스텔톤 색감이나 신선한 아이디어 제품들이 많이 출시되고 있다고.
평소 주방엔 에어 프라이기에 닭다리살이나 돌리고, 밥솥에서 엄마가 만들어 놓은 밥이나 푸는 게 전부인 나에겐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변화 움직임이었다.
마케터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해보고자 면접을 준비하고 시장조사를 해보면서 다시 한번 느꼈다.
'아 나도 독립해야겠다'
독립한다고 해서 누구나 자신의 공간을 가꾸고, 소비형태가 다양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나만의 공간을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나의 취향을 찾아가는 데는 분명 도움이 된다.
급하게 이사를 진행하다 보니 준비과정이 짧았다. 입주까지 주어진 시간은 단 5일. 나는 우선 내가 잘하는 방식대로 서점에 가서 인테리어 관련 서적과 매거진 5권 정도를 들춰보았다. 먼저 시행착오를 겪으며 원룸 인테리어에 뛰어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며 최소한 피해야 되는 것들에 대해 공부를 했다. 3시간 정도 서점에서 알짱대며 알게 된 원룸 인테리어 꿀팁 몇 가지
1. 공간이 넓어 보이고 싶으면 무헤드 침대 프레임을 사자
2. 오바해서 한꺼번에 와르르 다 사지 말자. 사놓고 보니 가구 조화가 안 맞아서 물건이 애매해지는 경우가 왕왕 있다.
3. 밝은 톤을 사용하자. 어두우면 공간이 더 좁아 보인다. 화이트&우드는 실패하지 않는다.
4. 식물 활용을 잘 하자.
이 정도이다.
독립 한지도 이제 3주 정도 지났다.
그 말인즉슨 다음 주에 월세를 내야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직접 독립해보니 내가 생각보다 생활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바로바로 치우고, 빨래도 쌓아두지 않고, 쓰레기도 제때 갖다 버린다.
군대 이후로 이렇게 빠릿빠릿하게 공간을 치우는 게 처음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겐 이 공간에 대한 자율성을 갖고 있다.
순전히 내 의지에 의해 깔끔하게 정리하며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자율성을 느낄 때 행복과 가까워질 수 있다고 하는데,
독립하면서 깨어난 자발적인 모습이 썩 마음에 든다.
변화가 필요했던 때에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독립하면서 나는 그동안 내 돈 주고는 잘 안 해본 소비를 하기 시작했다.
마켓컬리, 쿠팡, SSG를 활용하며 먹거리 플랫폼을 이용해 하나하나 시도해 보고 있다.
생전 처음으로 밀키트를 구매해서 리조또를 해먹기도 하고, 비비고에서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고등어구이도 사 먹어봤다.
리조또 보리를 익히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매뉴얼대로 15분을 익히고 프라이팬으로 옮겨 소스와 함께 15분은 더 볶았는데 밥이 설 익었다.
전날부터 보리를 불려놨어야 했나?
뭐 아무렴 그래도 내가 만든 첫 밀키트 음식이니 냉장고에 넣어놓고 이틀에 걸쳐 다 먹었다.
앞으로도 음식에서의 도전은 차근차근 이어나가며 나의 취향을 찾아볼 것이다.
독립을 하면서 확실하게 알게 된 하나의 취향이 있다.
나는 꽤 식물 기르기를 좋아한다.
플렌테리어 성격으로 테이블 야자와, 마오리 소포라를 들여왔는데
이 녀석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면 괜스레 마음이 뿌듯하다.
어느샌가 인터넷을 뒤져보며 이 친구들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고자 공부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2주 만에 벌써 새로운 싹을 피어 올리며 쑥쑥 커가고 있다.
이 친구들을 보며 생명력과 성장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다.
학교에서 스테디 하게 들리는 예시로
대나무의 죽순이 7년 동안 기를 모아 대나무가 크면
그 이후로는 하루에 몇 미터씩 자란다는 인내와 끈기를 역설한 이야기를 들을 땐 그다지 와닿지 않았는데,
내가 직접 물도 주고, 해도 더 잘 받게 위치도 옮겨주고, 더 잘 자라게 이것저것 신경 써 주면서 식물들을 키우니 성장과 인내에 대한 이야기를 더 공감대 있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생명력에는 나름 규칙이 있다.
성장을 위한 환경 구축과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인내 혹은 고통으로 치부되는 시간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필수 불가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월급 받으면 몇 친구 더 들여놓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