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에 흐르는 마음
오늘도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회색빛 하늘 아래, 세상이 촉촉하게 젖어가는 오후.
창밖으로 들려오는 빗소리는 속삭속삭,
마치 빗방울이 땅에 닿으며 건네는 안부 인사 같았다.
이런 날엔 마음도 덩달아 차분해지고, 고요하게 가라앉는다.
최근 엇갈리던 전화가 마침내 연결되었다.
조급함보다는, 서로의 타이밍이 맞기를 기다린 느낌이라
통화 연결음이 멈춘 순간이 더없이 반가웠다.
그분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인데, 우리는 서로를 ‘선생님’이라 부른다.
알게 된 지는 5년쯤 되었고, 요즘 그분은 다소 힘든 시기를 보내고 계신다.
사실 나는 가끔씩 이야기를 들어드릴 뿐, 썩 그렇다 할 도움은 되지 못한다.
“잘 될 거예요.”
“그래도 지금 그렇게 선택하신 게 최선이고, 잘하셨어요.”
사람은 결국,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가야 한다고 믿는다.
강물이 바위에 부딪혀 요동칠 때처럼, 마음도 억지로 돌려지면 혼란스러워진다.
대부분 우리가 힘든 이유는, 그 자연스러운 흐름이 어긋날 때 생기는 것이니까.
우리는 통화의 한계를 느끼며, 여름휴가철이 지난 8월쯤 만나 커피 한 잔 하기로 했다.
“선생님, 오늘 하루 종일 비가 와요. 빗소리 들리세요?
흐린 날에 처지지 않게, 힘내세요.”
괜한 감성에 젖으실까 걱정되어 건넨 말이었다.
“그래도, 선생님. 오늘 이렇게라도 목소리를 들으니까 힘이 나요.”
그분의 말에 가슴 한편이 뭉클해졌다.
별것 아닌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나 또한 위로를 받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
통화를 끝내고 나니 어느새 조카 하원 시간.
우산을 챙겨 황급히 밖으로 나섰다.
비는 제법 세차게 내렸고, 샌들 안으로 물이 스며들어 발이 다 젖었다.
상가 바닥이 미끄러울까 살금살금 걷는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조카가 환하게 튀어나왔다.
오늘도 태권도에서 스티커를 네 개나 받아 기분이 좋아 보였다.
팽수가 그려진 반투명 우산을 펼쳐 들고
평소보다 더 “조심조심,”이란 말을 입에 달고 걸었다.
현관에 도착해 우산을 가볍게 털자, 사방으로 튄 빗방울이 청량하게 느껴졌다.
“이모, 우산에 구멍 났나 봐. 어깨가 다 젖었어.”
조카의 말에 마음이 또 한 번 말랑해졌다.
하얀 티셔츠가 어깨 부분부터 촉촉하게 젖어 살결에 살짝 달라붙어 있었다.
“지렁이다! 비 오면 지렁이들이 숨 쉬려고 나온대!”
조카는 신기하다는 듯 가리켰다.
계단 앞 보도블록 위로 지렁이 한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빗물을 온몸으로 받아 내는 듯이.
비가 이 작은 생명체들에게도, 세상 밖으로 나올 용기를 주는 것만 같았다.
젖은 어깨의 차가움이 서서히 체온과 만나 따뜻해지고 있었다.
물이 주는 감각,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특별한 의미인지 새삼 깨달았다.
문득 손 안으로 흐르던 물의 감각을 처음 받아들였던 헬렌켈러의 순간이 떠올랐다.
손바닥 위에 새겨진 “W-A-T-E-R”.
물이 그녀에게 세상을 열어주었듯,
비는 우리에게도, 지렁이들에게도 새로운 감각을 깨워준다.
모든 생명을 연결하는 다리처럼 말이다.
나뭇가지 끝에서 빗물이 떨어지는 순간마다
우리는 서로를 조금 더 돌아보게 된다.
우의를 쓴 아기 엄마가 유모차를 끌고 계단을 오를 때,
옆에서 동네 아주머니가 유모차를 받아주었고,
아기 엄마는 아이를 덮은 비닐 커버를 정돈해 주며 안위를 살폈다.
정육점 아저씨는 계단에 매트를 다시 깔아 다듬어내고,
카페 사장님은 여분의 우산과 우산꽂이를 꺼내놓았다.
누군가 미끄러질까, 혹은 감기에 걸릴까 걱정하는 마음들.
헬렌켈러도 처음 물을 경험한 후 비 오는 날을 만났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가 세상을 새롭게 알아갔듯,
오늘따라 유독, 비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천천히 열어준다.
“비 소리가 좋은 하루네요”
“촉촉한 오후 편안히 보내세요”
“비 맞지 않게 조심해요.”
“우산 꼭 챙기세요.”
“비 좀 그치면 움직여요.”
“미끄러우니 운전 조심해요.”
“물 웅덩이 조심하시고 다녀오세요”
“계단에서 넘어지지 않게 주의하세요”
“우산 없으시면 말씀하세요”
“집에 무사히 도착하시면 연락 주세요”
이런 평범한 인사에 이미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서로를 염려하는 마음이 말 너머로 전해지는 순간,
어느새 우리의 마음은 따뜻해진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누구를 걱정하고,
그 걱정을 받은 이는 또 다른 이를 떠올린다.
따뜻한 마음도 흘러 서로의 메마른 틈을 적시고,
비는 앞으로도 우리에게 마음의 언어가 되어 내릴 것이다.
내일도 비가 온다면, 우리는 또 누군가에게 안부를 묻겠지.
이 잔잔한 순환이 바로 우리가 느끼는 일상의 소중한 위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