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을 응원한다. 그렇지만 나 자신을 낮추지 말자.
‘부모의 행복은 가장 불행한 자녀의 행복지수만큼이다.’라는 말이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의 칼 필레머가 ‘아무리 행복한 일이 많아도 자녀가 불행하면 부모는 행복할 수 없다. 양육만큼 고무적이고 즐겁고 도전적이고 실망스러운 경험은 드물다.’라고 하였다.
힘들면 그만하라는 남편의 말이 참으로 서운하게 들린 날이 있었다. 내가 돈만 벌자고 일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만 키운다고 집에 있다 보면 내 삶이 만족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날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지낸다는 것은 사실 의식적으로 주문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체력적으로 힘에 부칠 때면 항상 밝게만 지낼 수 없는 ‘내가 못났다’라고 결론이 나는 그 밤이 참 속이 상했다.
‘내 잘못이야.’ ‘내가 못 했었네.’ ‘괜히, 나 때문에.’
아이 둘을 키우며 식구들에게 내가 입에 달고 살았던 단어들이었다.
“내가 좀 일찍 왔으면 다치지 않았을 텐데, 내 탓이지 뭐.”
“어젯밤에 내가 꼼꼼히 챙겼어야 했는데.”
“그것 봐, 내가 그냥 애를 재울 걸 그랬어. 괜히 맡겼어.”
주변에서 하는 말들이 난삽하게 내 주변을 맴도는 날 특히 나를 더욱 낮추곤 했다.
하루는 엄마가 그런 나를 다 알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촌철살인 같은 이야기를 했다.
“너만 엄마냐? 네가 그런 말을 하면 너희 엄마는 어쩐다니?
그러면 너를 낳은 내 탓이니?
마음을 좀 편하게 가져, 지금도 잘하고 있는데.
모든 것을 네 탓으로 생각하지 마.
그렇지 않아도 아빠도 네가 왜 이렇게 지쳐 보이냐며 물어보더라.”
내가 한숨을 쉴수록, 내가 나를 낮추고 있는 동안 우리 부모님은 나와 함께 낮아지고 있는 기분이 들었을 테다. 내가 내 아이에게 밥숟가락을 들이밀 때, 우리 엄마는 나에게 반찬 한 가지라도 더 챙겨주시려고 하고, 간식거리라도 입 속에 넣어주시려고 하듯이 말이다. 방과 후 손주들을 봐주고 계신 친정집으로 도착하면 퇴근 후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리고, 내 푸념도 받아주실 것 같은 마음에, 내 탓을 외치다가 자칫 엄마 탓으로 몰고 가는 꼴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엄마는 아이의 말 한마디, 아이를 향한 말 한마디에 감각의 날이 서 있는 사람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나 역시도 여전히 엄마의 딸이었던 것이다.
“너를 그렇게 웃게 만드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니?”
연애 시절, 밤마다 동네 앞에서 지금의 남편과 산책을 즐기고 귀가하는 나를 보며 엄마가 하던 소리였다. 분명 나를 웃게 해주는 남편이기에 부모님도 사위에게 한결같은 응원을 보내주고 계신다. 그때 부모님의 행복지수도 나의 행복지수를 따라 어느 정도는 높아져 있었을까?
한번은 남편에게 “설거지 도와줘서 고마워”라고 했다가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도와주다니. 말을 왜 그런 식으로 하지?
같이 하는 거지. 내가 해주는 게 아니고 하는 거야.”
나도 모르게 나는 내 자신을 계속 낮추고 있었다. 워킹맘은 슈퍼우먼이 아니다. 어느 강의에서 강사님이 하신 말이 생각난다. 슈퍼맨과 슈퍼우먼은 대등하지 않다고. 슈퍼우먼, 슈퍼맘은 집안일도 완벽해야 하고 회사 일도 완벽해야 하는 건데 일과 가정 양립지원의 법률 존재 자체에 감사해야 하는 것보다는 법 자체가 슈퍼맘이 되라고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이야기였다. 일리 있는 말이다. 나는 결코 슈퍼우먼을 꿈꿀 필요가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우리 아이들의 행복지수를 높일 수 있도록 평범한 워킹맘을 살아내면 되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