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진과 사브리나의 어린 시절
b. 진의 삭제된 기억
진은 자신의 부모나 형제자매, 친척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기억을 전혀 떠올리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특별히 자신을 불쌍히 여길만한 일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아니 그렇게 여기지 못하도록 연합국으로부터 제대로 된 조치를 받았다.
경제적이고도 정치, 사회적인 등급은 자신과 네트워크를 기계적으로 결합하는 장치의 수준이 결정지었다.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을 더 빠른 속도로 결합해서 인식하고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아웃풋을 내는 것이 이른바 화이트 컬러에겐 신분을 가르는 척도였고, 얼마나 더 많은 신체의 부위가 성능 좋은 기계로 대체되어 있어 작업의 효율성을 높이는가는 블루 컬러나 주로 몸을 사용하는 일을 하는 이들의 신분을 갈랐다.
진이 지금 사용하는 "알파 트레커"라는 무선 네트워크와 결합이 일어나는 제품의 수준은 상층의 신분을 가진 계층이 사용하는 기기 수준이었다. 접속이 지구의 어디엘 가나 되고, 이유 없이 끊기지 않았으며, 통과할 수 있는 보안 단계의 등급이 높아져 있어 공짜로 접근할 수 있는 데이터의 범위가 넓었다. 메인 프레임의 입출력자가 되고자 하는 수강생 중에 성적 우수자에게는 이 같은 기기가 장학금 같은 개념으로 주어졌다.
외부에서 해킹 등으로 접근할 경우 이를 포착하고 방어하는 백신 기능의 수준도 높았고 보안 기능을 포함한 시스템의 업그레이드가 빨리 이뤄졌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떨어지는 "오메가 트레커" 정도를 결합할 경우 모든 기능은 비참하리만치 현저하게 떨어져 버렸다. 만약 HH테스트에서 이런 수준의 기기를 가진 것이 진이었다면 수소 연료 폭파 과정에서 죽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그같이 갖추고 있는 "바이오 메카트로닉스"의 수준이 떨어지는 가정에 속한 아이의 부모가 살인적인 수준의 인플레로 치솟은 물가와 집값, 생활비, 교육비를 버텨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거나 가정불화가 심화된다거나 부모가 아이를 키울만한 자격이 안되거나 아이가 구제불능의 반사회적인 인물로 자라나거나 해서 부모 자식 간의 정상적인 관계가 이뤄지기 어렵게 되면 내릴 수 있는 막다른 길의 선택지가 "관계의 삭제"였다.
물론, 부부나 연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기도 했고, 비참한 기억으로부터 해방되거나, 자신의 복수심이나 살의 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선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정부 기관은 "관계가 삭제된 사람"이 사회 속에서 적응해서 살아갈 수 있는 유무형의 지원을 했다. 그럼으로써 사회 안전망의 수준이 높아지는 것으로 판단했다.
연합국 정부는 아이가 영유아인 경우에는 부모의 결정에 의해서, 아이가 유아에서 소년기까지는 정부기관의 판단에 의해서, 15세 이상이 되면 아이의 부모와 아이에게 "관계를 삭제"할 수 있는 권리를 제공하고 부모와 아이 간에 중재를 서서 결론을 냈다.
(출처: Photo by Keren Fedida on Unsplash)
많은 이들이 선택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전체 인구의 일정 비율이 끊이지 않고 선택했다. 기억하기 싫은 누군가를 완전히 자신의 기억에서 소멸시키는 동시에 주변인과의 관계는 다시 다른 기억으로 메우는 "자동 오류 수정 시스템"의 마법 같은 기능이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런 사회적 기능이 있다는 것은 그렇게 많은 사람이 알고 있진 않았다. 어떤 종류의 관계에서 막다른 길에 처한 사람이 필사적으로 찾다 보면 나오는 비밀스러운 장치였다. 이를 실행하는 정부 기관의 조직은 이런 장치에 대한 설명을 한 뒤에 삭제를 하게 되던 말던 꼭 들은 사람의 기억을 조치의 마지막에는 지웠다.
그 기관에 종사하는 인원은 출근할 때 업무를 위한 기억 데이터를 다시 받았고, 퇴근할 때 이를 지웠다. 의뢰인이나 관계 종결자들과의 관계는 기관으로부터 떠날 때 또한 삭제되었다. 오로지 "케언즈"와 "메인프레임 입출력자"만 이 기관의 존재를 이해하고 이곳에서 물리적인 오류가 벌어졌을 때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매뉴얼을 기억 속에 갖고 있었다.
잃어버린 기억의 단서가 되는 것들이 혹 주변에 남아 있다면 이를 본 순간 무의식 속에라도 남아 있던 기억이 되살아나거나 유추로써 관계를 다시 정리해서 깨닫는 것은 어떻게 막을 것인가?
이 시대에는 아날로그적인 수단에 기록을 남기는 이가 거의 없었다. 아니 물리적으로 사물 등에 굳이 자신의 기록이나 기억을 찾을 단서를 남길 필요가 없었다. 다시 말해서 네트워크와 각 관계를 맺거나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의 "특정 관계에 대한 기억"이란 데이터를 지우고 나면, 다시 되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출처: Photo by Aaron Burden on Unsplash)
인류는 지구 온난화로 인한 사막화를 방지하기 위해서 모든 섬유 제품과 내구성 소재, 건축물, 종이, 생활용품, 운동 용품 가릴 것 없이 100% 재생해서 사용하도록 의무화했다. 그럼으로써 재생하지 않은 제품을 만들 때 발생하는 지구 온난화의 가장 큰 원인인 CO2를 포함한 그린가스 발생량을 떨어뜨리고자 했던 것이다.
이론과는 달리 모든 것이 다시 재생되고 그 재생된 것을 다시 재생하는 무한 루프는 생각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재생 제품을 만드는 쪽으로 거의 모든 생산 설비가 변화해갔지만, 재생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물자가 희소해지는 현상이 발생하고, 제품을 덜 사고 덜 쓰는 쪽이 환경을 지키는 일이라는 사상이 지구를 활보하면서 그 같은 경제 구조의 순환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재생을 하는 기술은 더 이상의 진보가 일어나지 않았다. 생산자에게 경제적인 인센티브가 더 이상 크게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급격하게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진 산업적인 방식으로 재배된 옥수수나 콩, 사탕수수, 나무 등의 유기물을 사용해서 만든 소재가 화석 연료 사용을 줄여서 지구 온난화를 방지하는 일로 이해되어 이것이 다시 지구를 뒤덮었다.
하지만, 이미 산업적인 공정을 거친 유기물은 생산 과정과 폐기를 위한 소각 과정 등에서 어찌 되었든 그린가스를 발생시켰고, 유감스럽게도 지구 온난화에 의한 사막화의 위기 시계는 조금 느려지긴 했어도 계속 움직였다. 그다음에 인류가 대체제로 쓰기로 결정한 것은 생분해성의 소재였다.
일정한 습기가 있어 미생물이 번식하기 좋은 땅 밑 같은 공간에 그 소재로 만들어진 제품을 파묻으면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서 그 제품을 통째로 모두 미생물이 먹어치운다. 그런 소재를 사용하는 붐이 일었다. 쓰레기를 소각할 일이 없어져 이로 인해 발생하는 그린가스를 줄일 수 있었고, 폐기물로 인한 지구 환경의 파괴도 파격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재생 제품과 유기물로 만든 제품, 생분해성 제품이 인류를 지구 온난화란 위기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게 하는 동안, 주변에서 아예 만들지 말아야 할 소재들의 목록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인류의 거의 대부분이 이미 인터넷과 연결되어 있는 상황에서 종이 같은 것은 굳이 쓸 이유가 없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출처: Photo by Roman Kraft on Unsplash)
종이는 이미 유기물로 만들어진 것이고 재생도 가능한 것이었으며, 심지어 썩어 없어지기까지 하는 것이지만 데이터를 보여주고 기록하고 전달하는 것이 첨단화한 시대에는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문신도 일종의 개성과 중요한 기억을 드러내는 수단이었지만, 그것에 사용할 염료나 화학물도 지구 상에서 사라져 갔다. 디지털 색상 정보를 결합한 소재가 또한 싼 비용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굳이 실제로 염색을 하거나 색상을 입히거나 마킹을 하는 등의 수고를 할 영역이 극단적으로 줄어들었다.
오로지 선택받은 예술가들만이 잉크나 도료, 염료, 물감, 먹 등을 사용했고 연필이던 볼펜이던 기록을 위한 거의 모든 도구들은 시시각각 사라지고 있었다. 강의실에 아직도 분필이 있는 것은 고급스러운 사치이자 동시에 일종의 빈티지였다.
"관계의 삭제"를 선택할 경우 하룻밤만 잠을 자고 일어나면 세상은 '바뀌지 않은 듯 달라져버렸다'. 그러나 진은 알고 있다. 기억은 정말로 못하겠지만 기억 저편의 어른 거리는 희미한 바람이 그가 태어난 이후 제대로 사랑받거나 사랑했던 적이 없었다는 노래를 가끔씩 불러주고 있었기에.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는 것이 사실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는 것만 감을 잡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그가 "사브리나"를 본 후에 느끼게 된 사랑의 감정이라는 것은 신화 속에 나오는 전설의 샘물을 찾아 처음 들이킨 것과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