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진과 사브리나의 어린 시절
a. 진과 사브리나의 이동
"케언즈 교수는 애매모호한 사람이야. 결론이 이미 자기에게 있는데도 그걸 제대로 드러내질 않으니....... '진실'은 그대로 있지만 수용자의 입장에서 다르게 받아들이는 거 아냐? 절대적으로 답이 하나일 경우도 있잖아. 유사어인 '진리'로 해석하자면, '절대 진리'라는 것도 있듯이 말이야."
진은 그가 살고 있던 지역에서 서민 계층이었지만 추첨으로 수백만 분의 1의 확률을 통과해서 메인프레임 입출력자 교육과정에 들어가 엄청난 신분 상승 기회를 잡게 되어 엄청나게 감사해야 하는 수강생 중에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불만이 전혀 없진 않았다.
물론, 케언즈의 수업 방식은 시대적으로 가장 진보적인 수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진은 그 수업에서도 자신이 그저 하나의 기계적인 기능을 가진 한낱 도구로만 가공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케언즈는 심오함과 정밀함, 그리고 선문답 방식과 힌트 제공으로 제자들의 내면에 있는 잠재력을 최대치로 끌어내는 방식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은 그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제자들의 성장 방향을 정해 유도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자율을 가장한 타율이라고 할지 아니면 타율을 자율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고 있는 듯했다.
"글세, 난 그런 그의 방식에서 진정한 스승으로서의 자세를 보고 있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관능미를 느끼게 될 정도야. 그는 학생들과의 인간적인 친밀함을 느끼는 기회를 강렬하게 원하면서도, 마치, 그런 것을 통해 학생들의 시간과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빼앗을까 봐 조바심을 내는 것 같아."
사브리나는 천천히 진을 쳐다보면서 눈동자를 빛내며 얘기했다. 그리고 눈빛은 충분히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난 창문가로 들어오는 적당한 조도의 햇빛처럼 진을 향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출처: Photo by Chad Madden on Unsplash)
진은 사브리나의 이런 눈을 볼 때마다 가슴이 출렁이며 내려앉는 느낌에 빠져 들었다.
'네가 다른 인간을 관능적이라고 하고 있구나......... 내게 세상 누구보다도 관능적인 네가........'
"그래, 케언즈는 이미 이 세계의 거인이야, 거인은 대부분 심리적으로 상대방을 압도하면서 조금씩 보이는 인간적인 면만으로도 무의식 중에 호의를 이끌어내기 마련이지. 그렇지만, 그 거인의 가슴에 심장이 들어 있는지, 아니면, 가득히 기계만 들어차 있는 것인지는, 그냥 곁에서 본 것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고."
사브리나는 질투심에 휩싸인 진의 눈을 다시 지그시 바라보았다.
"케언즈 교수에게는 없는 젊음을 갖고 있는 미래의 거인이 뭐 이렇게 의기소침해질 필요가 있을까?" 사브리나의 눈과 말투는 질투심에 빠져 비틀거리는 진의 바닥까지 모두 훑어보는 것처럼 그를 관통해서 휘저어 들어갔다.
'케언즈는 나의 미래에도 여전히 거인 그 자체가 될 사람이야. 내가 거인이 되어도, 그의 성취를 넘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이 시대에 아인슈타인이나 괴테,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인물보다도 한참 높게 평가받는 인물을 누가 어떻게 따라잡는다는 거야? 사브리나.'
눈빛으로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다가 진은 사브리나의 손을 끌어 잡아당겼다.
"일루미네이션(Illumination) 공원에 가자. 네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그 전처럼, 갑자기 날 끌어안거나 게놈지도 3차 개정 버전의 내용을 떠올리지 못한다고 키스하는 것은 싫어."
"아니, 이번엔, 그 이상의 일을 할 거야. 싫어할 수 없을 거야."
그는 사브리나의 기다란 손가락을 꼭 쥐어 끌어당김과 동시에 매끄럽고도 유연한 허리를 다른 팔로 감싸 안았다. 그리고 자신의 왼손에 낀 반지의 큐빅 부분을 누르며, 동시에 일루미네이션 공원을 의미하는 인식 키인 3.3.7 코드의 눈 움직임을 해 보였다.
(출처: Photo by Jayden Sim on Unsplash)
그의 동공과 큐빅이 마주한 지 약 10초 정도가 흐른 뒤에 번쩍이는 투명한 재질의 거대한 스트로처럼 생긴 원통 파이프가 매끄럽게 출렁이며, 그들이 있는 공간의 저편에서 순식간에 날아와 그들의 발치 앞에 와서 멈춰 섰다.
파이프의 지름은 약 2미터. 진은 파이프의 끝에 달린 모니터의 버튼 몇 개를 눌렀고, 그와 동시에 파이프는 '슈욱'하는 소리를 내며 그들을 빨아들이면서 호흡기를 얼굴에 부착하고 검은색의 보호 슈트를 착용시켰다.
"다이너소어가 17번지에서 일루미네이션 공원까지 순항 모드로 연결 요망, 속도는 '마하 3' 규정 속도 준수." 또박또박 발음을 정확하게 말하자마자 이 "대중교통 진공 전송관"은 정확한 위치로 승객을 전송할 준비를 마쳤다.
원통 파이프의 입구는 순간 진공 상태로 봉해졌고, 일종의 무중력 상태로 파이프의 내부에서 그들의 몸은 약 30cm 정도 떠올라 음속으로 날아갔다.
약 30초 정도를 이동하였을 때, 그들은 아래로 보이는 수많은 투명 원통관들과 그 속에서 음속으로 움직이는 점들을 잠시 쳐다보았다. 그 투명관들은 마치 해파리의 촉수처럼, 곳곳을 향해 뻗어 있었고, 그 속을 움직이는 점들은 혈액 속의 헤모글로빈 같아 보였다.
(출처: Photo by Joel Filipe on Unsplash)
모든 관을 움켜쥐고 있는 메인프레임 시의 한가운데에 있는 돔형의 추진 에너지 중추인 중앙 역을 경유해서 그들이 일루미네이션 공원에 도착했을 5분 뒤쯤엔 4-5천 개 정도의 원통관들이 공원의 도착지역에서 춤추듯이 출렁이고 있었다.
추진력이 서서히 역으로 작용되면서, 파이프의 끝이 개방되는 순간, 슈트와 호흡기가 제거되었다. 파이프는 땅으로 그들을 서서히 내려놓았다.
"이거 타고나서, 제발 머리카락이 좀 덜 흐트러졌으면 좋겠어, 어렸을 때부터 소원이야."
사브리나는 길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다듬었다. 그의 머리 위에서 출렁이고 있던 대부분의 파이프들이 마치 넘겨진 머리카락인양 그 순간 지평선 저쪽으로 사라졌다.
(출처: Photo by Martin Visser on Unsplash, Photo by Rachel Coyne on Unsplash )
그 눈빛과 머리카락, 같이 일루미네이션 공원까지 타고 갔던 대중교통 진공 전송관, 그 모든 것이 진에겐 선명하게 빛나는 추억이다. 그 어떤 순간에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진은 사브리나 외에는 그 누구와도 사랑이 더불어 있는 기억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