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노 닛산 얼라이언스의 영웅인 카를로스의 성공과 추락, 도망의 다큐멘터리
(사진 출처: Netflix)
이번 글에서는 다음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읽고 난 다음에 찔러 보기를 위한 작품을 고르는 데 있어 필요한 내용이 있다면 직접 적용하면 된다. 이것은 "다큐멘터리 찔러 보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다. 일부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뜻에서 쓴다.
1) 다큐멘터리 찔러 보기, 가장 중요한 것 하나
2) 찔러 보기, “도망자: 카를로스 곤의 이상한 이야기”
1) 다큐멘터리 찔러 보기, 가장 중요한 것 하나
“외부 영향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최근에 “넷플릭스”가 제공하는 “다큐멘터리”에 어느 정도 이상의 신뢰를 느끼면서 보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의 비난도 못지않게 받고 있지만 이 회사가 “초국가적인 미디어 매체”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방송된 2차 대전을 그리는 다큐에서는 “일본”이 “핵폭탄”을 맞아 25만 명가량이 사망하며 “인종청소”를 당할뻔했다는 이야기를 남발하는 반면, '일본군이 전쟁 기간 동안 하루에 만 명꼴로 주변 국가의 사람을 학살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는 내용도 공식적인 영어 "다큐멘터리"에서 대사로 나왔다.
“다큐멘터리”는 다른 “영화”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를 만드는 감독이나 스태프 작가 등이 편집 방향을 정하고 찍어가는 “장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라도 “극화”는 보다 감동적이고 재미있으며 흥미를 끄는 스토리로 가공하지 않을 수 없다. “다큐멘터리”는 분명히 “진실”을 추구하지만 이 역시 스토리를 가공하고 편집 방향을 세운다.
그렇기 때문에 “정밀한 사실”을 보기 위해 “다큐멘터리”를 보는 이는 만드는 “감독”의 성향을 파악해야 한다. “감독”보다 더 중요한 요소는 “제작사”가 “다큐멘터리”가 파헤치고자 하는 집단이나 개인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다. 선입견을 갖지 않고 작품을 고르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것만큼은 예외적인 필터다.
“나는 신이다”같은 “다큐멘터리”는 용기 있는 한국 공중파 방송국의 PD가 찍었다. 이미 유명무실해져 가는 “사이비 종교 단체” 몇 개를 다뤘지만 그들 중에 일부는 아직 폭력을 저지르는 등 사회에 폐를 끼칠 수 있다. 방영권을 초국가적인 “OTT”인 “넷플릭스”에 줌으로써 방송하는 것에 대한 영향력을 최소화했다.
“한국”과 “일본”, “미국” 3개국을 중심으로 아직도 큰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통일교”까지를 다룬 “사이비 교주가 되는 법”이란 “다큐멘터리”도 “넷플릭스”를 통해서 방송되었다. 재미를 더하기 위해 “사이비 교주가 되기 위한 방법”을 가르쳐주는 교육 방송 같은 포맷을 유지했다. 모든 나라에 방송되고 있다.
독립적인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제작사 또는 감독이란 타이틀이 확실하게 보인다면 이 또한 가점을 준다. 후원사 등의 목록에 이해 관계 업체가 나오는 등, 기타 만들어진 작품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요소가 많다면 결국엔 그 업체나 요소의 구미에 맞는 진실을 가공해 낼 뿐이다. 또한 제작하는 이가 살고 있는 나라의 영향력도 감안이 된다.
2) 찔러 보기, “도망자: 카를로스 곤의 이상한 이야기”
https://brunch.co.kr/@rpyatoo/124 에 적혀 있는 글은 2016년에 “카를로스 곤의 르네상스”란 자서전을 읽고 나서 쓴 글이다. “히딩크”와도 같은 존재로 그를 신격화하고 영웅시 한 나같은 사람은 “피”나는 반성 없이는 “카를로스 곤”의 “다큐멘터리”를 찍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아무래도 변명하거나 미화하게 될 공산이 크다. 지금 쓰는 이 글마저 미심쩍다.
이 “다큐멘터리”를 만든 감독인 “루시 블락스타드 감독”이 노르웨이의 여류 감독이자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 어느 정도의 공신력을 쌓고, “넷플릭스”에도 출품해서 선정될 고품질의 작품을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틀어본바, 진실을 위해 균형감과 객관성, 문화적 상대성을 고려한 섬세함을 느꼈다.
그는 망해갔던 “브라질 미쉐린 타이어”와 “프랑스 르노”, “일본 닛산”을 다시 회생시켰다. 글로벌 경영사에 있어서 영웅으로서의 성과를 쌓아갔다. 2018년엔 일본의 공항에 내린 자신의 전용기에서 전격 체포당했다. 2019년엔 드라마틱하게도 일본을 탈출해서 레바논으로 도망가 있다. 소송은 난항이며 결과는 쉽게 예상할 수 없다.
이 작품은 “카를로스 곤”이 “르노”의 최고 경영자를 만났던 젊은 시절, 군더더기 없이 꼭 필요한 말만 하고 명민하게 필요한 일의 세부사항을 철저하게 파악하고 개선책을 실행하며 밀어붙인 “초인적인 경영 능력”을 가진 그를 우선 첫 부분에 제대로 드러낸다.
그가 “닛산”의 COO로 “르노”에서 건너와 일본 대기업에서는 거의 유일한 외국인 경영자로서 “닛산”에 부임한 것은 사실 일본인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 분명했던 정황이 앞에 나와 있다. 이후에 그가 자신의 성공에 따르는 반대급부로써 도요타 경영자의 7배에 달하는 연봉과 요트, 대저택 등을 “닛산”의 돈으로, “내부 결재”는 받았지만, 받아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린 죄로, 갑작스러운 체포와 구금으로 이어진 복선이 나온 것이다.
부임 후의 휴가는 서양 회사에서야 누려야 할 당연한 복지여서 “카를로스”로서는 문제 될 게 없는 휴식을 취했지만, 부임 시에 공급하는 업체와 모여서 “박”을 터뜨리며 사기를 북돋는 전통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도 결과적으로는 “카를로스”에 대한 적개심이 누적되어 온 정황 중의 일부로 나온다.
“확신”과 더불어 있는 “신념”으로 “성공”을 창출해 내기 위해 “구조조정”에 따르는 대량 해고를 지시해서 관철하고 성과로 보여줬다. 밀어붙이는 그의 스타일 때문에 회사에서 “자살자”가 생겨나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자동차의 모든 부품의 목록을 다 파악하는 경영/생산/판매/영업/홍보에 모두 정통한 그의 행보는 존경할만한 부분으로 나왔다.
반면에 자신의 옷을 다리는 일본의 직원에게 섬세한 배려를 하면서 옷을 꼭 필요한 만큼만 사고, 셔츠도 해질 때까지 입는 검소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런 인간적인 부분도 이 “다큐멘터리”가 찾아서 드러낸 것은 그만큼 “감독”이 한 인간이 단순히 하나의 면모만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양의 관점에서는 불합리하게, 일단 구속이 되고 교도소든 가택이든 구금이 된 상황이 되면 실질적으로 소송의 결과가 나오게 될 때까지 실질적인 징역형을 치르게 되는 “일본”의 “법에 관련된 관행”에 의하면 이미 “카를로스”는 구제받을 길 없는 범죄자가 되어 있다. “일본인” 대다수의 입장에서는 회사 돈을 횡령한 범죄자가 된 것이다.
“카를로스”의 “자매”들은 인터뷰를 하면서 “그”의 탈출을 기쁘게 반긴다. “레바논”에서 “일본”의 불합리한 법 체계에 저항한 자신의 탈출을 정당화하는 “그의 목소리”도 나왔다. “일본”의 입장을 다소 부정적으로 보는 것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가톨릭 신부”를 살해한 “범죄자”로서 그로 인해 추락한 자신의 가정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대단한 인물로 자신을 인정받고 포장하면서 호사로운 삶을 만들고자 “부정”을 행했을만한 배경도 밝혀낸다.
앞 뒤를 맞춰보면 그것은 매우 이상한 이야기로 보인다. 왜냐면, "닛산"의 현재 경영진 등은 망해가는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운 "카를로스"의 공적에 대해서 이 시점에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의 강권에 의해서 했다손 치더라도 그에게 나간 비용에 대해서 자신들이 "결제"했다는 사실마저도 속았다며 번복한다.
"카를로스 곤"이나 그의 "자매" 등은 그가 사적으로 갖다 쓴 "회사의 돈"에 대해서 그가 잘못했을 거라는 일말의 인정이나 회의감도 갖지 않는다. 양쪽의 대립된 사고방식의 차이는 과연 무엇인가? 이 양 진영은 전혀 화해할 수 없이 전혀 다른 행성에 살고 있는 존재들인가 싶을 정도다. 교훈보다는 이 이상함을 봐야한다.
*그 이상함을 빙챗으로 그린 그림으로 남겨 본다. 이어지는 소설을 더 써볼 생각은 들지 않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