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모든 인간은 죽는다"를 시대에 맞게 각색하고 변형하다
(사진 출처: Rotten Tomatoes)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에
흥행 영화화되지 않은 것이
안타까웠다.
2007년도에 개봉한 이 영화를 또한 께름칙하게 여기고 보지 않아 왔었다. 17년이나 지나서야 볼 용기를 갖게 된 것은 회사 안에서 아주 드문 일이긴 하지만, 이 영화를 추천해 준 직원이 있어서였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라는 "시몬 드 보브와르"의 시대를 넘어서는 고전이 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가 시대를 휩쓰는 철학사조였을 때에 만들어진 소설이다. 역설적으로 불멸의 인간이 나온다.
“시몬”은 "원조"로서 "실존주의"를 철학적 개념으로 시작한 사팔뜨기 눈의 "장 폴 사르트르"와 당시만 해도 파격적이었던 "계약결혼"을 하고, 현대의 "동반자"제도 같은 관계를 모델화하고도 평생 해로 했다.
프랑스의 당대 철학 교수 자격시험에서 수석(사르트르)과 차석(보브와르)이 만나 이룬 이 관계는 학문적인 교류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관계의 형식을 갖고 있었기에 오히려 더 영속적이었다.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는 이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누보로망"이니 "아방가르드니"하는 일부러 잘 알아먹지 못할 정도로 난해하게 쓰인 스타일의 글이어서 누구도 이걸 제대로 보고 이해했단 얘길 못 들었다.
그렇지만 "보브와르"의 소설인 "모든 인간은 죽는다(번역서 따라서는 인간은 모두가 죽는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에 흥행 영화화되지 않은 것이 안타까웠다.
"영원히 죽지 않는 이"에겐,
"배움"도 "사랑"도 "정복"도
"기술"도 "후세"도 의미 없으니
퇴물이 되어가는 한 배우가 자신이 묶고 있는 호텔에서 먹지도 자지도 비를 피하지도 않는 한 남자를 보게 된다. 그에게 말을 걸고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중세 시대부터 불멸로 살아온 이임을 알게 된다.
그 배우는 이 남자가 오랜 세월 쌓아온 지식을 가지고 자신이 다시 흥행 배우로 복귀할 수 있는 대작의 시나리오를 적어 줄 것이라 기대하고, 살아온 이야기를 남김없이 듣는다.
하지만 그 남자는 불사의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가치 없는 인생인지를 보여준다. 자신이 사랑한 사람이 모두 자신보다 먼저 죽는 것을 봐야만 했던 것을 자세히 설명한 것이 처절하게 기억이 난다.
그래서 무작정 오래 살기만을 원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없는 것인가를 단 한 권의 책으로 더 이상의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정리를 해준 궁극의 소설이었다.
그가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선택하게 된 것은 배움도 덜하고 생각 없이 몸을 움직여서 하는 일이었다. "영원히 죽지 않는 이"에겐, "배움"도 "사랑"도 "정복"도 "기술"도 "후세"도 의미 없으니.
"맨 프럼 어스"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를 보았던 이 위 단락의 37년 전 1987년도의 기억을 좀 더 선명하게 소환했다.
저예산의 작품으로써 2007년작인 "맨 프럼 어스"는 1946년작 "모든 인간은 죽는다"를 원형으로 한 변형으로 보였지만 그대로 내용을 답습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흥미진진함을 더했다.
1. 보기 전에 버려야 할 선입견
1) 초저예산 영화로 소규모 인원이 한 장소에서 대사만 주고받기 때문에 지루할 것이다(X)
2) 역사학 교수가 불멸임을 여러 학문의 교수에게 설명하는 어려운 내용일 것이다(X)
3) 플롯도 스토리 라인도 구상도 없는 저급의 작품일 것이다(△)
2. 맨 프럼 어스, 찔러 보기
최소한 굉장히 영리한 작품이라는
인정은 해야만 한다
1. 보기 전에 버려야 할 선입견
1) 초저예산 영화로 소규모 인원이 한 장소에서 대사만 주고받기 때문에 지루할 것이다(X)
영화 제목을 키워드로 조금만 인터넷을 뒤져봐도, 초저예산에 극강의 가성비를 가진 이 작품이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지는 그대로 머릿속에 그려질 만할 정도가 된다.
다 본 것 같은 기시감이 한 번에 머릿속에 자리 잡히게 되면 그렇지 않아도 과도한 영상물과 정보, 서적, 오디오북, 업무상 필요한 자료, SNS 등을 봐야 할 생각으로 가득한 이가 시도할 확률이 떨어진다.
이런 망설임을 17년이나 갖고 있다가 보게 된 산 증인으로서 한마디 하자면, 이 작품의 스크립트를 전체적으로 모두 보고 본다고 해도, 이 작품은 여전히 재미있다.
2) 역사학 교수가 불멸임을 여러 학문의 교수에게 설명하는 어려운 내용일 것이다(X)
작품의 관객 수준을 대략 당시의 중학교 2학년 정도되는 교육 과정을 지나친 관객을 대상으로 선사시대 이후에 살아왔다는 주장을 합리화하는 대사가 이어지기 때문에 크게 어렵지 않고도 설득력 있다.
보고 나서 찾아볼 만큼의 어려운 지식은 이 영화 속에 나오고 있지 않고, 그나마도 챗지피티든 구글이든 찾아보면 쉽게 내용 파악이 가능하다.
3) 플롯도 스토리 라인도 구상도 없는 저급의 작품일 것이다(△)
정말로 그렇게 볼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심혈을 기울여서 이 작품의 스토리를 다듬고 인물과 인물 간의 치밀한 심리적인 변화와 극적 갈등을 신경 쓴 흔적이 그렇게 많이 드러나 보이지는 않는다.
최대한 설득력 있는 상식적인 견지에서 이야기를 해 나가고, 파국으로 치달아 주인공의 정신상태를 같이 있는 이가 의심하게 되거나 허언증에 빠져서 지껄이는 소리로 치부하고 화를 내는 장면이 적다.
작품이 잘 보여준 미덕은 학문을 제대로 배운 사람이라면 설사 사기꾼을 만나서 전혀 엉뚱하고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민주적인 사회의 에티켓에 의거해서 이야기하는 모습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도 흥미진진하게 관객이 선사 시대로부터 현실까지의 과거에서 자기가 아는 지식 속에서 "기독교"와 "유대교", "불교"라는 "종교"까지 거론하는 데도 불타거나 금지되지 않는 작품으로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이 이 작품의 위대함이다.
너무 과격하지는 않게 영화 속의 주제 속에 당시까지는 아직 흥미로웠던 요소를 논쟁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심각하지는 않은 이야기로 남겨 둘 수 있었던 것이 또한 이 작품의 핵심적인 가치 같다.
초저예산 영화라는 딱지는 사실이므로 붙여도 되겠지만 이 영화를 "저급"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다. 최소한 굉장히 영리한 작품이라는 인정은 해야만 한다.
"실존"하는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개념에서
"불멸의 인간"이 마치 진짜로
현실에 살아 있는 것처럼
그려낼 수 있는 것이다
3. 맨 프럼 어스, 찔러 보기
영상 기술적인 면에서 만 4천 년을 살아온 인물의 과거 회상씬 한번 안 나오고 현실의 풍경이나 컴퓨터 그래픽조차 하나 드러난 것이 없기 때문에, 영상의 미학이나 화면 구성 등으로 평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대신에 스토리와 연기로 승부했다. 그런 의미에서 불사인인 "존 올드맨"을 연기한 "데이비드 리 스미스"의 연기력의 수준이 대단했다고 볼 수 있고, 호흡을 맞춘 다른 배우도 뛰어났다고 할만하다.
그렇지만, 이 영화 속 배우가 이 작품 이후에도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만한 연기를 하며 두각을 나타냈던 바는 없었던 것 같다.
지루함이 생겨나지 않을 만큼의 극적 긴장감을 "팀워크"와 더불은 기적적인 "앙상블"로 만들어 낸 것이 더 중요했었던 것 같다.
역사학 교수인 "존 올드맨"이 10여 년간 대학에서 알고 지냈던 교수들을 이사 가기 전의 자기 집에 초대해서 자신이 선사시대 이후 만 4천 년을 살아왔다고 자연스럽게 말하는 게 내용의 거의 전부다.
생물학과 미술학, 고고학, 정신과, 인류학 교수가 처음에는 진실 게임이나 역할 놀이라도 하듯이 농담을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다가 그 같은 주장의 허위를 지적해서 무너뜨리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2007년도에 술자리 등의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로 도배하려고 작정을 한 사람을 만났을 경우 그 말의 진위를 파악하는 것은 꼭 "불사"의 존재로 살아왔다는 주장이 아니었어도 쉽지 않았다.
어렵다고 생각할 만큼의 내용이 서로 오가는 것은 사실 없다. 하지만 2024년의 오늘이었다면, 한 사람의 진위의 상당 부분을 검색 서비스나 AI로 찾아내는 것은 훨씬 더 쉬워졌다.
작품의 내용을 훨씬 더 풍부하게 만들 만큼의 방대한 정보가 들어간 스크립트도 1~2시간만 들이면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술적으로야 더 쉬워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와 유사한 영화는 점점 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만들기 힘들 것 같다.
오히려 더 뛰어난 작품으로 진화할만한 가능성이 보이는 영역은 소설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에 나와 있는 논의의 요소를 뛰어넘어서 덧붙일만한 화제가 "인공지능"의 수준이 진일보하며 나왔다.
영상물을 만들 때의 피치 못할 한계인 "시간과 자본의 한정성"은 "모든 인간은 죽는다"라는 오랜 옛날에 쓰인 작품에 나온 서사적인 풍부함과 서술의 섬세함을 "맨 프럼 어스"에서는 죽였다.
여러 명의 부인을 두고 여러 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아무리 나이를 먹는 것처럼 분장을 해도 들키게 되고,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여러 번 봐야 했던 비극도 축소된다.
하지만, 영상을 만들 때 가두어놓아야만 하는 시간과 비용의 문제를 잊어버리고 "불사의 존재"가 실제로 현실에서 있을 때의 그럼직한 행동을 풍부하게 그려낸다면 훨씬 더 확장되고 재미있을 것이다.
물론, 뱀파이어와 싸우고, 좀비와 싸우며, 히어로와 히로인으로서 살아가는 수많은 존재가 영상물과 코믹스, 소설로 이미 많이 나와 있긴 하다. 최근엔 이런 작품에서조차 철학적 성찰이 나오기도 한다.
내가 말하고 있는 더 만들어졌으면 하는 작품은 "실존"하는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개념에서 "불멸의 인간"이 마치 진짜로 현실에 살아 있는 것처럼 그려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