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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소설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정서경 박찬욱, <헤어질 결심 각본>

by 알뜰살뜰 구구샘

"영화는 원작 소설을 이길 수 없다."


여태까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물론 메이즈러너나 헝거게임처럼 영화도 괜찮은 경우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소설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시작 자체가 영화에게 불리하기 때문입니다.


소설은 제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집니다. 배우 섭외도 제가 알아서 합니다. 당대 최고의 배우로 캐스팅할 수 있습니다. CG팀에게 월급을 줄 필요도 없습니다. 외계인이든 우주 공간이든 상상만 하면 다 그려집니다.


하지만 영화는 다릅니다. 찍고 편집해서 보여줘야 합니다.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보수도 지급해야 합니다. 사공도 많습니다. 배급사, 투자자, 제작자들에게 휘둘리다 보면 감독의 의도와는 다르게 영화가 산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외가 나타났습니다. <헤어질 결심> 각본이 그것입니다. 영화와 글을 모두 다 봤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압승입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글에서 박해일은 그냥 나쁜 놈이었습니다. 멀쩡한 부인 놔두고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주는 사람이었죠. 주말부부인데, 경찰인데, 주중에 자기 자취방에 다른 여자를 들이는 게 말이 되나요? 도저히 응원을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달랐습니다. 저도 모르는 새 박해일의 마음에 빠져버립니다. 바람이 아니라 로맨스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어쩌다가 설득을 당한 걸까요?


제 머릿속에서 상상한 박해일의 자취방은 대학교 원룸이었습니다. 옵션으로 있는 냉장고와 침대가 다였죠. 하지만 영화는 달랐습니다. 예쁜 벽지와 소품들이 가득합니다. 거기에 박해일과 탕웨이가 들어갑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바람이 로맨스로 바뀝니다.


책과 영화를 다 본 뒤, 아내에게 소감을 말했습니다. 처음으로 책보다 영화가 좋았다고요. 아내가 듣더니 명쾌하게 정리해 줍니다.


"소설은 세안이라면, 각본은 약안이잖아"


무릎을 탁 쳤습니다. 생각해 보니 소설과 각본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게 말이 안 됩니다. 둘은 완전 다릅니다.


교사는 1년에 몇 번 공개수업을 합니다. 공개수업을 하기 전에 지도안이라는 것을 짜죠. 수업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계획한 사전 설명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도안의 종류에는 크게 2가지가 있습니다. 세안과 약안입니다. 세안은 세세하게 짰다는 뜻입니다. 유의사항, 준비물, 질문과 예상되는 답변까지 아주 자세하게 적혀 있습니다. 어떤 교사가 수업을 하더라도 비슷한 결과물이 나옵니다. 반면 약안은 약식 지도안입니다. 수업은 교사의 머릿속에 이미 다 있습니다. 핵심만 간추려서 적혀 있죠. 교사의 성향에 따라 전혀 다른 수업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세안보다 약안을 선호하는 추세입니다. 단위 교사의 자율성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지도안 없이 수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세안보다 약안을 선호합니다. 아이들의 창의성을 더 끌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돌발상황에 대처하기도 쉽습니다. 큰 틀만 짜 놓으면 내용은 학생들이 채워줍니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 봅니다.

소설은 혼자서 완결성을 지니지만, 각본은 영화로 만들어져야만 의미가 생깁니다. 마침내.


각본만 보신 분들이 계시다면, 영화도 보시길 강력 추천드립니다.




정서경, 박찬욱, <헤어질결심 각본>을 읽고 작성했습니다.

사진: UnsplashAlex Litv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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