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의 힘빼기 기술
봄날은 무심하게 가고 마음과 시간은 또 이렇게 한계절을 지나갑니다. 이 좋은 계절에 어두운 책상 앞에서 골몰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올해 일과 병행하며 대학원 박사 과정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공부하는 마음을 이야기해봅니다.
대학원에서는 '하면 할수록 부족함이 드러나는 공부'를 하게 된다. 매주 광범위한 전공서적, 영어 논문, 연관 논문들을 읽는것이 과제로 주어진다. 교수님을 중심으로 둥글게 들러앉아 알게된 것, 이해가 안가는 것, 궁금한 것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알지 못하면 질문할 수 없어 게을러질 틈이 없다. 석사과정 때보다 공부의 양은 훨씬 많아졌는데 하면 할수록 부족함이 느껴진다.
공부한 논문을 설명해서 발표하는 ‘발제 당번’이 돌아오면, 교수님의 날카로운 질문 화살을 온몸으로 막아야 한다. 논문을 읽으며 모르고 지나쳤던 지점들, 생각해보지 못했던 관점들, 특히 통계와 같이 내가 취약하다고 느끼는 부분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면 동료들 앞에 ‘바보’가 되는 부끄러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수치심을 견뎌내는 일은 대체로 1학기 학생들의 몫이다. 발제 당번은 왜 이리도 빨리 돌아오는지.
결혼, 출산, 대학원 진학, 회사 이직 같은 일들은 인생 일대의 커다란 선택이다. 평소에 신중한 의사결정을 선호하는 편인데 이상하게도, 인생의 큰 사건들엔 대책없이 몸을 던지곤 했다. ‘분야를 막론하고 박사 학위를 받는 데 걸리는 시간이 7~10년’ 이라는 걸 박사 과정을 시작 하고서야 알았다. 학부 시절처럼 코스웍만 신경쓰거나 석사 때처럼 졸업 논문을 하나만 쓰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수과목, 보충과목, 학회지 논문, 졸업 논문, 영어 시험, 졸업 시험.. 일과 학업을 병행하다보면 졸업까지 10년도 부족할 것 같다는 압박감이 밀려온다.
‘일을 하면서 박사과정을 마치는 것이 가능하긴 한 것일까?’, ‘많은 논문을 읽고 쓰는 시간들을 내가 감당해 나갈 수 있을까?’, ‘가족과의 시간을 충분히 함께 보내지 못해도 괜찮을까?’와 같은 물음표들이 마음 속을 어지럽힌다. 이것들을 고요히 잠재우고 다시 책을 붙들다 보면 저절로 수행자가 되는 기분이다.
박사 과정을 마쳐도 꽃길이 펼쳐지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투자한 어마한 시간과 학비가 수익으로 회수되길 기대하면 시작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성적으로만 판단하면, 대학원은 미친짓에 가깝다. 더 좋은 아내이자 더 상냥한 엄마가 되는 기회, 친구들과 풍요로운 시간을 보낼 기회, 명품백을 몇개는 살 수 있는 비용적 기회를 모두 포기하고 어두운 책상 앞에 앉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박사과정을 시작할 당시 교수님과의 면접에서 ‘이번에는 학업에 제대로 전념해 보겠습니다!’라며 호기로운 말을 외쳤던 장면이 떠오른다. 부끄러워진다. 생계와의 싸움 앞에서 학업의지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학비가 충분했더라면, 일하지 않고도 공부할 수 있다면, 머리라도 좀 더 좋았더라면', '영어라도 잘했더라면' 끊임없이 가지지 못한 것들이 원망스럽고 마음이 무겁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고 논문 한줄을 더 읽는 것만이 최선임을 상기시키며 스스로 정신을 붙들어 멘다.
“왜 공부하세요?” 동료 학생들에게 반복적인 질문해본다. “그러게 말예요. 그런데 알아가는 과정이 재밌잖아요?” 대체로 공통적인 대답이 돌아온다. ‘호기심’ 이 그 원천인 것이다. 유영만 교수는 ‘공부는 개념으로 생각하며 사고력을 개발하는 과정이며 사고력은 전적으로 내가 구사할 수 있는 개념적 사용력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대학원 공부란 궁금한 것을 개념화하고 다시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 내는 과정인 것이다. 궁금한 것들이 많을수록 공부할 것도 많아진다.
대학원의 과정들은 호기심을 풀어나가는 ‘사고’를 바탕으로 한다. 고등학생 때처럼 외우는 과정의 수업은 거의 없으며, 이것을 학업성취도의 기준으로 보지도 않는다. 생각과 지식을 새롭게 배우고, 자신이 배웠던 개념을 재정의하고,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여는 작업을 무한 반복하는 ‘과정’ 의미를 둔다. 누군가가 정의해 놓은 지식을 사고에 의해 새롭게 재개념화 시켜가는 작업이기도 하다.
물음표 하나를 풀어나가며 느끼는 묘한 짜릿함이 있다. 이것은 공부를 계속해나가는 커다란 원동력이 되어준다. 궁금한 것들은 많은데 설명 안되는 상황이 답답했던 나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주변에 물으면 이상한 질문 그만하라는 짜증 섞인 답이 돌아왔을때의 물음표들이 대학원에서는 진지하게 다뤄지고 교수님과 동료들이 내 질문에 꼬리를 물어줄때 희열을 느낀다. 공부 재능과 자본이 충분하지 않은 내가 달팽이처럼 천천히 그리고 악착같이 공부해나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학업에 온전히 매진할 수 없는 처지를 비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일과 육아, 가사노동의 현장과 싸워가며 늦은 저녁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지만, 이 고생을 선택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1학기엔 누구나 '멘붕'에 빠진다는 선배들의 말을 위안 삼아본다.
지도교수님은 면접 때에도, 모임에서도, 스승의 날 행사에서도, "모두들 힘빼고 하세요."라고 말씀하셨다. 먼저 박사를 졸업한 친구는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고 대충하라"는 말을 거듭 강조했다. 공부는 마라톤이기 때문일것이다.
잘하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고 힘빼기의 기술을 연마하는 것, 1학기 박사생의 가장 큰 과업인것 같다.
같이 보면 좋을 글들
https://brunch.co.kr/@rsalon/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