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염소 여럿이 풀을 뜯고 놀아요 해처럼 밝은 얼굴로"
서로의 밤이 흐르고 아침이 왔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호랑은 먼저 스스로 일어나 씻고 나와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늘어지게 늦잠을 잔 지랑은 이제 막 눈 비비고 일어났다.
“굿모닝 에브리원!! 오늘도 역시나 아침부터 다들 바쁘시군요!!”
방문을 열고 나오며 지랑이 쾌활하게 말했다.
“어? 뭐야? 요새도 정치인을 총으로 죽이는 사람이 다 있네~독립투사여 머여~?”
화장실로 향하던 지랑이 말했다. 티비엔 지난밤 총기 저격으로 사망한 외국 정치인에 대한 뉴스가 속보로 나오고 있었다.
“죽을 놈 잘 죽었지 모. 다른 나라 그렇게 괴롭히더니 쌤통이다.”
지랑의 말을 듣고 교복 매무새를 만지던 호랑이 속삭이듯 말했다.
“야 그런 말이 어딨어~ 그래도 사람이 총 맞고 죽었는데 그게 할 소리냐~?”
지랑은 고등학교 들어가면서 한 번씩 저렇게 세상 일에 지나치게 차가워진 호랑이 자못 걱정스러운 마음에 말했다.
“와~ 잘난 인권주의자가 우리 집에도 있으셨네 이지랑씨~ 세계사 시간에 잠이나 퍼졌으니 뭘 제대로 모르시나 봐요. 잘 들어! 저 나라는 이웃나라를 전쟁으로 강제 침탈했고 그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민간인을 죽였는지 몰라? 그러면서도 본인들의 이득만 착취했고, 그 적나라한 사실을 부인하는 썩어빠진 나라라고!”
호랑은 지랑보다 본인이 탁월하다고 믿는 분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여지없이 지랑을 가르치려는 투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뉴스 속보.
“이에 전 세계의 정치 지도자들은 그를 추모하기 위한 분향소를 각국 대사관에 설치하고 금일부터 추모를 진행할 예정으로..”
“하. 아침부터 짜증 난다. 저딴 놈 잘 죽었다고 해도 모자랄 판에 뭐 잘났다고 전 세계에서 제사상까지 차려주나 참나”
호랑은 아침부터 못 볼걸 봤다는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아~알겠습니다 역사가 동생님. 나도 다 알거든요?
나는 학교 세계사 시간엔 자도 역사엔 관심이 많거든요!? 내가 존경하는 어떤 선생님이 그러더라.
국민의 정서와 지도자의 정서는 달라야 한다
어때? 국가를 이끌어나가는 사람들이라면 이 말이 필요하지 않겠어? 우리 같은 한낱 국민의 정서가 비록 ‘아 저놈 잘 죽었다’ 더라도, 지도자라면 국익을 먼저 생각해보고, 국익에 우선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 참된 지도자라고.. 역사 시간에 쿨쿨 잔 나는 그리 생각하는데 동생님의 생각은 어떠신가? 크크"
사람을 설득시키는 재주를 타고난 E지랑답게 화려한 말빨로 호랑에게 물었다.
“아니.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국가지도자는 결국 국민이 뽑아준 거야. 근데 국민의 정서에 반하는 언행을 하는 게 과연 그 나라 지도자로서 맞는 행동을 하는 걸까? 국민이 뽑아줬으니 국민의 정서를 담아 저 나라에 ‘아 잘 죽었다 속 시원하다. 지하에 계신 그 나라 조상님들의 속이 시원하겠다’ 하는 게 나라의 지도자가 해야 할 일지. 당연한 거라고!”
호랑I답게 본인이 평소 생각했고 믿어온 것에 대해 타협은 없다는 투로 말했다.
호랑은 깊게 생각하고, 차분하게 상황을 살펴본 뒤 충분한 시간을 갖고 본인이 맞다고 생각하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리고 그 결론이 정해지면 그 이후로 어떤 특별한 변화가 없는 한 생각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 좋게 보면 원칙이 강하고, 나쁘게 보면 융통성이 없달까.
이번 대화도 마찬가지였다.
K-고딩답게 역사공부를 열심히 했던 호랑이었지만, 이런 침탈의 역사만은 공부하기가 유독 싫었다.
나라를 잃어가는 과정을 그렇게나 자세하게 잘 알려주는 것도 싫었고,
그 과정에서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 당시 지도자들의 모습도 한심했고,
나라를 뺏기고 나서야 그 나라를 다시 찾아오려고 누군가에겐 소중한 아빠이고, 엄마였을, 그리고 귀여운 자식이었을 독립투사들의 핏빛 삶을 알아가는 게 버거웠다.
그들 하나하나의 귀한 삶에 감정 이입되어 본인 스스로 지쳐만 갔다.
그럼에도 K-고딩은 그 모든 과정을 지켜봐야 하고, 더 나아가 머릿속에 암기라는 이름으로 각인시켜야 한다. 왜? 시험 잘 봐야 하니까. 그래야 대학 잘 가고, 그래야 결국 어른이 되었을 때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거라 그들은 가르치니까.
그 과정에서 마음이야 아프든 찢어지든 난도질되든 어찌 되든 말든. 결국 시험을 잘 봐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되는 정해진 K-고딩의 삶.
조금은 말도 안 되는 이러한 타인에게 감정이입을 잘하는 호랑의 I의 특성이 이럴 때는 참 힘들다고 호랑은 생각했다.
호랑은 어릴 때부터 그랬다. 예를 들어,
유치원 시절 흔한 동요 중 하나였던
“파란 하늘 파란 하늘 꿈이 드리운 푸른 언덕에
아기 염소 여럿이 풀을 뜯고 놀아요 해처럼 밝은 얼굴로
이런 노래가 있었다. 어린 호랑이는 처음 이 노래를 듣고 너무너무 마음이 아프다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빗방울이 뚝뚝뚝뚝 떨어지는 날에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엄마 찾아 음메 아빠 찾아 음메 울상을 짓다가” 특히 이 부분이 그렇게 슬프단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도 슬프고, 그런 날도 슬프고. 아기 염소가 엄마 아빠를 찾으며 울상 짓는 모습이 너무 슬프다고.
또 한 번은 초등학교 시절 엄마 손 꼭 잡고 전통시장에 갔을 때다.
“나 너무 슬퍼. 이제 시장 안 올 거야. 나는 백화점 사장님 할 거야. 그래서 저 사람들 다 거기서 물건 팔게 해 줄 거야.
시장에 앉아 물건 파는 할머니들을 처음 본 호랑이 했던 말이다.
지금이야 시장에 지붕도 있고 나름 쾌적해졌지만, 그 시절 시장이라 하면 몸빼바지 입은 할머니들이 김장할 때나 쓰는 본인 몸의 몇 배나 되는 주황색 큰 대야를 머리에 이고 나와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저 뜨거운 태양을 그대로 얻어맞으며 천 원, 이천 원 물건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그런 공간이었다.
물론 정작 물건을 파는 할머니들은 그곳에서 다른 할머니들과 이야기도 하고 깔깔 웃으며 즐겁게만 생활하고 있는데, 그 공간에 그러고 있는 할머니들을 본 호랑이는 슬픔을 먼저 느꼈다.
그래서 그들이 너무도 힘들게 살아가는 것으로만 보여 불쌍했고, 조금이나마 편하게 살았으면 해서 그때만 해도 호랑이 가장 좋은 장소로 믿었던 백화점을 그들을 위해 지어주고 싶다고 말한 것이었다.
호랑은 이렇게 어릴 적부터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다른 이들보다 지나치게 뛰어난 편이었다.
다만 학창 시절을 거치면서 그러한 공감능력이 그녀를 점점 힘들게 했다. 과도한 공감능력으로 인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호랑은 너무 많은 마음의 상처와 슬픔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언젠가부터 호랑은 친구들, 가족들,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불편해했고, 급기야 최소한의 관계만 유지한 채, 그저 소수의 마음 맞는 사람들과만 가까이 지냈다.
이 점 또한 최대한 많은 사람을 알고, 그 많은 사람 중에 최소한의 적만 두고 나머지를 모두 자기편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언니 E지랑과 다른 점이었다.
지랑은 그런 호랑이 한편으론 이해가 되면서도, 이렇게 특정 주제에 있어 지나치게 냉소적인 모습을 보이는 호랑이 참 어렵게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뉘예 뉘예~ 알겠습니다 동생 어르신~ 난 이만 씻어야 돼서 독립투사 어르신과 더 길게 얘기를 못해 아쉽네요."
그래서 그저 이렇게 장난이었다는 듯 급 대화를 마무리할 수밖에.
“아 맞다. 야 이호랑!! 그나저나 공모전 보낼 글 쓰는 거 잊지..”
쾅.
호랑은 듣기 싫다는 듯 문을 닫고 노란 닭장 버스를 향해 뛰어나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