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ng request.
‘저딴 게 언니라고 진짜!!’
세차게 내리는 비를 온전히 맞고 있는 노란 버스가 어서어서 타라는 듯 부릉부릉 소리를 내고 있다.
호랑은 아침부터 지랑과의 대화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서둘러 나오느라 우산을 챙기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호랑은 버스에 닿기 전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을 수 밖에 없었다.
'뭐 어때. 그래도 난 비오는게 좋아.'
호랑은 언젠가부터 비를 피하기 위해 달리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비 오는 날도 맑은 날, 흐린 날처럼 날씨 중 하나에 불과하다 생각했기 때문에.
‘비오는 날 우산 안쓰는 나라에 살고 싶다’
버스에 오르며 호랑은 생각했다. 그리곤 비오는 밖이 잘 보이는 버스 창가 자리에 앉았다. 평소처럼 무심한 손길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는다. 본인은 오늘만큼은 옆자리 잠든 병아리들처럼 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지듯이.
그리고 쿨하게 두번째 손가락으로 MP3 플레이어를 재생. 가수 이소라의 노래 Song request(신청곡)이 흘러나온다.
'비오는 날씨에 딱이네. 아-좋다!
한가지..이어폰을 꽂았더니 창밖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건 구리네. 이 노래는 배경음으로 빗소리를 같이 넣었으면 더 좋았을거 같은데..'
호랑은 차분한 눈길로 창밖을 바라보며 마음 속 흘러드는 음악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창밖엔 또 비가 와 이럴 땐 꼭 네가 떠올라
내방엔 이 침묵과 쓸쓸한 내 심장소리가 미칠 것만 같아
So why turn up my radio.
어디서 목소리가 들려오고
슬픈 그 사연이 너무 내 얘기 같아서
Hey DJ, play me a song to make me smile.
‘아-정말 좋다. 마음이 울적한 이런 날에 나를 웃게해 줄 노래를 틀으라구. DJ양반'
노래는 계속 반복 재생되고, 창밖 빗발은 달리는 버스 속도만큼이나 더욱 거세진다.
눈을 감고 음악을 듣던 호랑은 아침 지랑과의 대화가 떠오른다.
"그게 니 문제야 이호랑. 너는 너무 감정이입이 심해. 그러니 잡생각이 많지. 널 위해서 해주는 말이야. 이 언니 말 잘 새겨들으라구."
어릴 적 언젠가부터 언니와 다툼이 있을때면 늘 듣던 말.
사람들은 내가 몰입이 너무 심하다고, 그리고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늘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듯이.
‘아주 작은 나무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 긴 가지가 자라, 그 끝에 감당할 수 없이 큰 열매들이 맺혀
결국 그 작은 나무가 견디지 못한나머지 쩌적쩌적 말라 갈라져버리는, 그런 나무 같은 사람. 난 그런 나무같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호랑은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지랑과의 대화는 호랑에게 다시 이 생각을 떠오르게 하기 충분했다.
호랑도 할수만 있다면 본인을 힘들게 하는 생각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특히 자신도 모르게 상대방에게 감정이입되어 자연스럽게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제발 누군가 멈춰줬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지랑과는 달리, 호랑은 어릴 때부터 그런 아이였다.
전통시장에 구경가 맛있는 튀김 사달라고 조르는 지랑이가 아닌,
할머니들의 갈라진 손과 떼낀 손톱이 먼저보여 마음아파하던 아이.
엄마찾아 울고 아빠찾아 우는 아기염소들의 마음이 너무 슬퍼서,
그게 너무 본인처럼 느껴져 대성통곡하며 동요배우기 싫다고 떼쓰던 아이.
도깨비인 남자주인공과 인간 여자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 결말에 여주가 갑자기 사망. 어쨌든 환생해서 해피엔딩을 맞이하지만.
드라마를 보는 내내 호랑은 어느날은 남주가, 그 다음날은 여주가 되어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오롯이 혼자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슬픈 감정에서 헤어나는 방법을 몰랐다는 것.
결국 그런 과몰입의 늪에 빠져 3-4일을 고열에 시달려 응급실에 실려간 아이.
현실에 절대 일어날리 없는 좀비물, 공포물, 스릴러물임에도 당장 본인 앞 현실에 나타날 것처럼 느껴 절망하고, 그래서 밝고 희망으로만 가득찬 애니메이션만 고집하게 된 아이.
그게 호랑i였다.
아빠는 그런 호랑의 공감능력이 뛰어나다며 늘 추켜세워줬지만, 이런 경험들이 쌓인 호랑에겐 감정이입을 잘 한다는 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아무짝에 쓸모없지..누구도 모르는데, 나만 힘든..'
오늘 아침 지랑과의 말다툼도 그 연장선이었을 것이다.
나라를 빼앗긴 무능한 조상들, 그 나라 되찾아오겠다고 핏빛으로 물들어간 같지만 다른 조상들.
그리고 그 조상들을 가족으로 두었을 또 다른 조상들.
그 모든 이들의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이런 호랑이 감당하기엔 너무도 큰 것이라,
지랑과는 달리 유명 정치인의 총격사건에 대해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하게 되었을 수 밖에.
호랑은 그런 아이였다.
그래서.
그래서 호랑은
언젠가부터 지금처럼 이렇게 음악으로 귀를 막고,
시력이 나빠져도 가급적 안경을 쓰지 않은 채 흐릿하게 세상을 보고,
정말 필요한 말이 아니면 굳이 입술을 열지 않는.
분명 존재하지만 세상에 흐릿하게 내려 사라지고 마는 빗물같은 그런 사람이 되길 바라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믿었다.
Hey DJ, play me a song to make me smile.
귓가에. 그러다 마음에,
음악이 계속 울려퍼진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