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그때 그순간 그대로

세상엔 닦아도 닦아도 멈추지 않는 눈물이 있다.

by 빨양c


"뭐야 여보 울어?"

그냥 어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토요일 저녁이었다.

아니, 낮에 100일 파티를 했다는게 달랐다면 달랐을까.

나는 아까 먹은 100일 축하 분유를 응아로 만들기 위해 뱃속 단전에 힘을 모으며 천장보고 벌렁 누워있었더랬다.


'하-아무리 유산균을 때려먹어도 왜 이렇게 맘대로 안 되는 거람. 양수 시절이 좋았지. 그냥 알아서 들어오고 알아서 나가고. 이건 생전 안 써본 대장 소장 움직여서 응아 만들어내려니 영 번거롸!!! 심지어 내 맘대로 움직이지도 않고.. 정말 고되다 고되. 휴!'

모. 대충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던 것 같다.


"뭐야 여보 울어?"

엄마가 말했다.


'응? 운다고? 나처럼 응애응애?'

"응? 아..아냐. 그냥 저 노래 들으니까 갑자기 옛날 생각이 좀 나서."

누가 들어도 콧물훌쩍가득한 아빠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한가로운 토요일 저녁.

내 브레인이 팝콘브레인이 되건 말건 평화로운 우리 집 엄빠는 티비를 보고 있었다.

장모님은 100일 파티를 해주시곤 외출중이신가보다. 설마 이런날도 근무가신건 아니겠지?

설마?! 맞나?! 연로하신 분은 일하러 가고 젊은이들은 집에서 티비나 보고 있다니. 이 무슨 세상이 이런가!!


아무튼, 아빠가 응애 하고 있는 이유는, 티비에서 나오는 어떤 노래를 들었기 때문이라는 말인데.

그 노래가 뭔지 나도 들어보고 싶어서 작은 귀를 쫑긋 해본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 노래인지 들어볼까? 잘 기억했다가 아빠 울리고 싶을 때 놀려먹어야지 헿'


기다림의 끝은 기적이 되고
기적 같은 우린 운명처럼
서로를 알아보고
그렇게 눈앞에 서있죠
우리 사랑했던 우리 다시 만나
그때 그 순간 그대로
사랑했고 사랑할 거니까


'에엥? 이 노래는.. 그냥 전형적인 남녀 간의 이별과 재회를 그리는 노래 같은데.

뭐야 이거.. 아빠 그 망할.. 두 집 살림 거기 생각하며 우는 거 아냐?!'

고마워 다시 돌아와 줘서
그때 그 순간처럼 날
안아줘


'뭐? 안아줘?? 확 씨 패줄까 보다. 엄마도 우는 거 아냐? 으앙 나도 울래!!! 우리 셋 다 울자 그냥 으앙!!'

"주책이네 나도. 이런 노래 들으면서 왜 아버지 생각이 나는지. 훌쩍"

아빠가 애써 훌쩍임을 감추며 말한다.

엄마는 갑자기 일어서더니 옆에 앉아있는 아빠의 머리를 다 이해한다는 듯 앞에서 감싸 본인의 배에 기대게 하고 두 손으로 아빠의 머리를 끌어안아 토닥인다.


"응애!!!! (나도 안아줘우애애애애앵!!)"

그 모습이 낯설어서인지, 두집 살림 때문에 열받아서인지 나도 응애 소리를 질러본다.

내 울음 때문인지 둘은 잠깐 동안의 토닥임을 멈추고 내게 와 젖병을 입에 물린다.


"잠깐 스톱. 여기서 스톱."

솜뭉치가 아빠의 생각이라고 보여준 영상을 잠시 멈췄다.


'음. 기억난다. 맞아 아까 저녁때 저런 일이 있었지.

저 아버지란 게 뭔지 몰라서 엄마 몰래 두 집 살림의 원흉인가 분노했던 기억이 나는데.

저 아버지가 뭐야 대체?'

내 질문을 분명 들은 것 같은데 모른척 하는게 분명한 저 얄미운 솜뭉치는 아무 말 없이 다른 영상을 재생시킨다.



이번 영상은 1년 전 엄빠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영상 속 엄빠는 염라의 그것만큼이나 칠흑보다 어두운 새까만 옷을 입고 있었으며,

아빠의 왼팔엔 하얀색 천에 두 줄의 검은색이 감긴 띠를 두르고 있었고,

엄마의 머리에는 처음 보는 것임에도 보는 순간 가슴이 저릿한 낯선 순백의 리본이 꽂혀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딘가를 보며 울고 있었고, 아빠의 절규 섞인 눈물과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그 해맑은 사람이 저렇게까지 우는 모습에 나는 자못 놀란다.

아까 느꼈던 그 가슴 통증이 또 머리카락까지 솟구치는 것 같다.

'뭐야 이건. 나도 한번 볼래. 솜뭉치. 저 사람들 보는 쪽 확대해봐.'


남자 사람이 하나 누워있다.

얼굴을 확대하고 잠시 영상을 멈춰본다.


'음.. 처음 보는 얼굴인데.. 뭔가 낯익은데..'

그는 시대에 걸맞지 않은 삼베옷으로 온몸을 휘감고 있다.

머리는 점잖게 가르마를 탔고, 눈과 입은 굳게 닫혀있었다.

음.. 그냥 자는 사람 같은데? 왜 다들 울지?


'어...? 저 사람 피부색이.. 파래..? 보라색?... 염라보다 더 파래?'

열심히 얼굴을 요리조리 확대해보던 나는 화들짝 놀랐다.


현생 전, 현생을 위해 삼신을 만나러 가는 길, 어떤 이유에서인지 염라와 저세상 지옥불을 지났었다.

그리고 거기서 매일 위에서 퍽퍽퍽 잘만 떨어지던 파란 몸뚱이들을 봤었다.

그리고 누워있는 저 파란 남자도 그 파란 몸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00일의 마지막 날이라 가물가물해가던 저세상에서의 기억이, 갑자기 선명해지는 기분이다.


그래. 저건 죽은 사람이잖아.

아-그래서 저기 사람들이 울고 있는 거구나. 흠.. 장례식? 그런 건가 보네. 안타깝군 안타까워.

뭐 덕을 많이 쌓았으면 천국으로, 악을 많이 쌓았으면 지옥불로 가겠지.

이미 사람이 죽고 난 후 펼쳐지는 저세상의 기억이 선명해진 나로서는 사실 별 감흥이 없었다.

다만 아빠의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거슬렸다.

그렇게 영상을 보고 있는데 아빠의 눈물을 연신 닦아주는 내 하얀 솜뭉치와는 다른 붉은색의 솜뭉치가 보였다.


"뭐야 솜뭉치가 또 있었네. 헤이 솜뭉치. 너 나한테만 있는 게 아니었구나? 아빠도 솜뭉치가 있었나? 아니면 저 누워있는 사람 거?"


영상 속 붉은 솜뭉치는 어찌할 줄 몰라하고 있었다. 어떤 걸로도 아빠를 위로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그저 본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건 눈물을 닦아주는 것뿐이라는 듯 열심히 아빠 얼굴을 왔다 갔다 하며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하지만 우린 잘 안다. 세상엔 닦아도 닦아도 멈추지 않는 눈물도 있다.

물론 아빠는 그 솜뭉치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러다 갑자기 영상 속 붉은 솜뭉치가 영상을 보고 있는 내 눈동자를 향해 똑바로 쳐다보는 게 느껴진다.


"케켁."

영상은 당연히 과거니까 내가 보일 리 없는데 저 붉은 솜뭉치는 정확히 날 응시하고 있다.

마치 몰래 보다 걸린 것처럼 나는 너무 놀라 아까 먹은 분유 토를 또 뿜을뻔했다.


“내가 보여?”

붉은 솜뭉치에게 내가 물으려던 찰나,

내 옆에 있던 내 하얀 솜뭉치가 웬일인지 갑자기 급하게 영상 속 붉은 솜뭉치에게 가더니 자연스레 합쳐진다.

그러더니 영상을 조금 더 과거로 돌린다.

이상하게도 저녁때 엄빠와 같이 들었던 그 노래가 계속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그리운 목소리 그리던 얼굴
참 많이도 기다렸어
다시 만나자는 너의 한마디에 울컥 눈물이 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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