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한 태연하게 한다'는 것에서부터 전혀 태연하지 않다
안타깝게도 떠들어대는 머릿속 철학자 100명의 이야기를 다 들어줄 여유는 없다는 듯,
그 무리는 호랑을 향해 선택을 종용하는 눈빛을 쏘아댔다.
결국 호랑은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보지 못한 채, 그저 가장 마음이 끌리는 철학자를 선택한다.
'그래도 마지막 선을 넘는 건 아니지.'
분명 그 철학자는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저 머릿속 철학자의 말이 호랑의 입을 통해 무리에게 내뱉어졌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정신을 차려봤을 땐, 그 무리를 등지고 호랑은 뛰쳐나가고 있었다.
그 시절을 겪어본 이들은 알겠지만
그때 무리로부터의 "인정"이란 중2 그들에겐 세상 어떤 것보다 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반대로, 그 무리에서의 "이탈"로 인한 소외는-그래, 흔히 왕따로 포장되는- 말 그대로 세상이 무너지고, 절벽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날, 그동안 지랑인 척 살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던 호랑은 그 절벽 낭떠러지로 본인을 밀어 넣었다.
몇 년을 같이 웃고 떠들고 지냈던 무리에서 자의든 타의든 나만 혼자가 된다는 건,
늘 슬픈 비극이다. 그것이 중2에게든, 다 큰 어른에게든.
그렇게 뒤돌아서 뛰쳐나오던 호랑이 절벽 낭떠러지라 믿었던 그 칠흑 속이,
사실 본연의 i를 빛나게 해 줄 밝은 탈출의 순간이었다는 걸 알게 된 건, 먼 훗날이었다.
그렇게 호랑의 혼자된 밤이 흘렀고,
마음이 아무리 시궁창같이 새까맣져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아침은 찾아오고 세상은 밝아온다.
호랑도 그런 세상을 따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본인은 아무렇지 않다는 척 최대한 태연하게 교실에 들어선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최대한 태연하게 한다'는 것에서부터 전혀 태연하지 않다는 걸.
호랑은 교실에 들어서자 미묘하게 달라진 공기의 흐름을 느낀다. 분명 어제와 똑같은 위치의 칠판, 책상, 의자, 친구들이 교실에서 평소처럼 떠들어대고 있지만, 그들의 미묘한 눈빛이, 알 수 없는 쑥덕거림이 호랑은 직관적으로 느껴진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는다.
호랑은 어제 그 무리 중 하나였던 옆자리 "친구"에게 지랑이라는 가면을 애써 뒤집어쓰고 인사를 건네본다.
"안녕? 어젠 내가 몸이 좀 안 좋아서 일찍.."
호랑은 굳이 필요 없는 변명이 본인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나옴을 느낀다.
"ㅋㅋ 뭐래냐? 아침부터 꼴값 떠네ㅋㅋ"
무리의 하나가 말한다.
"야 너 오늘부터 우리 팸에서 나가리야. 그러니까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고 아는 척 좀 하지 마라. 지랑이 동생이라고 좀 껴줬더니 아주 어디까지 기어올라 병신이 ㅋㅋㅋ"
무리 중 또 다른 하나가 무채색의 말 속에 잘도 쌔빨간 칼날을 담아 호랑에게 던진다.
호랑은 그 말에 굳어버린 듯 자리에 그대로 멈춰버린다.
'여기서 언니라면 어떻게 했을까.'
망할. 이 순간에도 지랑이라면 어떻게 대처했을까를 먼저 고민하는 스스로가 한심해진다.
단지 쌍둥이라는 이유로, 언니처럼 밝고 활발하지 않다는 이유로 나라는 존재는 있어선 안될 존재인가 하는 머릿속 철학자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다 눈물이 핑 돈다. 어쩔 수 없게도.
그 무리 중 하나의 앞에선 절대 눈물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며 스스로 꾹꾹 감정을 눌러 담지만, 소리 없이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는다는 건, 그때 그 아이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결국 눈물이 흘러나온다.
"ㅋㅋ 우냐? 여러 가지 한다 진짜. 그동안 고생했네 이지랑 닮은꼴 흉내 내느라. 근데 그게 되겠냐? 넌 태생이 그 모양인걸?"
무리 중 하나의 말인지, 머릿속 철학자의 말인지 알 수 없지만, 친구라고 믿었던 이들로부터의 날 선 조각들이 호랑의 살갗에 가시처럼 박힌다.
호랑은 여전히 자리에 굳어있고, 눈물이 계속 흐른다. 눈물이 흐르고 흘러야만 굳어버린 본인을 녹여 움직일 수 있다 믿는 듯이.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수업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친하다 믿었던, 친구라 불러왔던 그 무리 중 누군가라도 마주칠까 겁이 나 내내 자리에만 앉아있다.
마치 무서운 늑대, 하이에나에게 물어 뜯길까봐 하얀 눈밭에 몸을 숨긴 하얀 토끼처럼.
하지만 토끼는 몰랐다. 토끼의 눈이 그 하얀 눈에도 유독 눈에 잘 띄게 쌔빨갛게 물들어져 있었단 걸.
눈물 탓이었을까.
새빨개진 호랑의 눈이 시계를 바라본다. 마침내 집으로 도망칠 수 있는 시간이다.
호랑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교실 문을 연다. 뛰지 않는다.
뛰면 도망치는 모습처럼 보일 것이고, 호랑은 그 하이에나 무리에게, 아니 아직도 수군거리고 있는 것만 같은 누구에게라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된다는 걸 직감한다.
아무렇지 않은 척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본다. 제발 평소처럼 자연스러워야 할 텐데.
호랑은 정말 최선을 다한다.
다행이다.
아무도 빨간 눈의 하얀 토끼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호랑은 생각했다. 그렇게 학교 밖을 간신히 뛰쳐나와 토할 것만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앞으로 걷고 또 걸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