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좋았다. 아니, 오히려 아무도 모르기를 바랐다.
"야 이호랑! 역시 여기 있었네. 걔네들이 뭐라 했어? 무시해~ 걔들 원래 그렇잖아. 내 친구들인데 나도 가끔 개짜증나서 패 버리고 싶은데 뭐. 너라고 오죽하겠냐. 괜찮아?"
그날 밤, 내 나무 옆에 앉아 있던 나는,
언니의 저 말에 어떻게 대꾸했는지, 무슨 대화를 이어갔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그날부로 나는 이지랑인 척 나대다 왕따 당하는 동생으로 전교에 소문이 났고, 언니는 애써 이런 나를 감싸주려 노력했지만, 내게 그 모든 원흉인 언니를 어린 내가 받아 들여줄 넓은 아량 따윈 없었다.
나는 학교에서 말하는 법을 잃었고, 아닌 척 당당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혹여나 그 잘난 하이에나 무리와 마주칠까 무서웠으며, 더 두려운 건 그런 나를 위로해준답시고 찾아와 복도 창가에서 손을 흔들어대는 언니를 마주해야 하는 일이었다.
"너넨 쌍둥인데 너는 참 다르구나."의 꼬리표떼기에 실패한 나는,
이지랑도 아니고, 이호랑은 더욱 아닌 그저 그런 쌍둥이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그냥 너답게 살아. 봐라 언니 따라가려다 가랑이 찢어진 거잖아.
I가 왜 E처럼 살려는 거야 대체?
암만 해봐라. I는 절대 E가 될 수 없어. 물론 반대로 E도 절대 I가 될 수 없지. 걔들은 I가 되고 싶어 하지도 않겠지만. 근데 그게 왜? 잘못이야?
내가 너라면 I인 너의 좋은 점을 더 키워서 더 큰 I, 그렇게 더 행복한 I가 되면 되는 거야.
E가 되야 행복해지는 게 아니고."
학교에서 말을 하지 않게 되어서였을까?
그때쯤 머릿속 철학자 100명 중 하나가 말했던 것 같다.
글쎄. 그냥 왕따 당하고 있는 나를 위로하려고 떠오른 생각이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한 철학자의 말은 당시 나에게 알 수 없는 힘을 주었다.
'나다운 거라.. 이호랑 다운거..?'
물론 아직 세상의 일부도 경험하지 못한 중2에게 철학자의 말은 아리송한 의문만 계속 이어가게 했을 뿐이었지만.
그때부터 나는 글쓰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왜 학교에 꼭 그런 아이 한둘은 있지 않은가?
만화를 좋아해서 혼자 구석에 앉아 연습장에 연필로 사각사각 쉬는 시간, 수업시간 가리지 않고 만화만 그리는 아이.
무리 이탈로 인해 말하는 방법을 잃어가던 호랑도 그렇게 구석에 홀로 앉아 머릿속 철학자들과 대화의 대화를 이어갔다.
비록 학교에선 아무도 호랑에게 말을 걸지도, 밥을 같이 먹지도, 집에 같이 가지도 않았지만,
호랑은 머릿속 그들과 끊임없는 대화를 이어갔고, 그것은 호랑의 연습장에 고스란히 기록되었다.
그리고 호랑은 점점 본인의 손글씨로 채워져 가는 연습장을 볼 때마다, 작지만 한없이 따뜻한 행복이 가슴 한편에 싹틈을 느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좋았다.
아니, 오히려 이 기록들을 아무도 모르기를 간절히 원했다.
세상은 늘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할 뿐이라 호랑의 연습장 속 이야기들이 아무나에게 아무렇게나 평가받는 게 싫었다.
나는 이호랑이라 글쓰기가 좋아서 그냥 썼을뿐인데,
왜 넌 이지랑과 다르게 이런 거나 하고 앉았냐는
언어의 날 선 조각이 또다시 살갗을 피투성이로 만들까 두려웠다.
그렇게 호랑은 계속해서 글을 썼다. 대부분은 철학자 100명의 머릿속 시끌시끌한 세상 이야기였지만,
어떤 날에는 철학자 여럿을 끄집어내 그들을 주제로 소설 한 편, 어떤 날에는 철학자 하나와 주고받으며 시 한 편, 어떤 날은 철학자를 보며 에세이 한편.
그렇게 꾸준히 글을 썼던 것 같다.
아무도 호랑의 곁에 있지 않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호랑은 혼자가 아니라 생각했다.
글 쓰는 그동안만큼은 학교 구석에 아무도 모르는 존재로 앉아있어도 본인은 무척 행복했으므로.
그렇게 유일한 휴식처였던 글쓰기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래 이어지지는 못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