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 없어. 그만 좀 나가줄래?”
'왜 우산은 아무리 써도 젖을까?'
왼쪽 어깨 젖은 물기를 털어내며 책상 자리에 앉은 호랑은 생각했다. 분명 조선시대부터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옛날부터 이 우산이 있었을 것인데, 이런 첨단 시대에 아직도 우산은 구시대의 유물처럼 그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우산 같은거 안들어도 물방울이 몸에 닿지 않고 튕겨나간다거나 그런 기술이 개발되지 않을까?
아, 그러면 비 맞을 때 느낄 수 있는 그 로망이 사라지겠구나. 그건 또 그거대로 아쉽겠다.
아침부터 노란닭장버스에서의 수면가스가 아직 남아있어서인지 몽롱한 생각을 이어가는 호랑이었다.
“하. 내가 또 너랑 말을 섞게 되네.질긴 인연이다 참, 그지? 그래도 지금 주변 보는 눈 많으니까 티 내진 말고. 이지랄 부탁이니까 특별히 도와주마. 뭐해줄까?”
어느샌가 교실에 들어온 C선배의 발걸음이 갑자기 호랑의 자리에서 멈추더니 말을 건넨다.
“?”
당황한 호랑은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호랑은 사실 그 선배가 교실 앞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긴장하고 있었다. 설마 본인한테 올까 애써 눈길을 피했지만, 그 선배는 지금 정확히 호랑의 앞에 서있다.
“야야. 저 오빠가 그 오빠지?”
“응. 그 완전 높은 고음 노래 커버 올려서 완전 페북스타 됐대~ 팔로워 폭발이라던데?”
“근데 그런 선배가 왜 이호랑한테 온 거래?”
어쩔 수 없는 주변의 수군거림이 들려온다.
호랑이처럼 학교에서 존재감 없는 아이에게 학교 유명 대스타가 친히 와서 말을 건다는 것만으로도 어린 그들에겐 하루 종일 이슈가 될 일이었다.
“무슨 소리야?”
호랑은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중학교 시절 본인에게 무리에서 꺼지라고 했던 당사자가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것도 그렇게나 좋아했던 그 사람의 그 차가운 목소리 앞에서 말이다.
그저 빨리 내 소중한 내 책상 앞에서, 내 눈 앞에서 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당한 사람에겐 지울 수 없는 핏빛의 상처가 그들에겐 지난날의 추억 정도로 치부된다는 걸 호랑은 잘 알고 있었다.
“뭐야? 이지랄한테 못 들었어? 너 뭐 공모전인가 나간다고 홍보해달라고 지 동생 좀 꼭 도와달라고 아침부터 난리던데. 옛 정이 있어 불쌍해서 도와줄까 왔더니만 쯧.”
또 이지랑이다.
작가 공모전에 꽂히더니 밤낮 할 거 없이 여러 사람을 괴롭힌다.
특히 이 C선배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잘도 그딴 부탁을 하다니.
너무 기가 막히다.
“필요 없어. 그만 좀 나가줄래?”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부여잡고, 다시 한번 작은 호흡을 내뱉는 숨에 얹어 간신히 말해본다.
하이에나 무리 중 하나였던 놈이어서 그런가 분명 힘주어 말한 것 같은데 말끝에 떨림이 섞여 나오는 것 같다. 그 떨림을 하이에나가 눈치챘을까봐 갑자기 겁이 난다.
“하하하"
그놈이 별 거 아니라는 듯이 갑자기 반 친구들이 다 듣도록 웃는다. 그러더니 허리를 숙여 호랑의 귓가로 다가오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위협하듯 말한다.
“주변 듣는 귀 많으니까 입 닫고 듣기만 해. 여전히 고결한 척은. 그래도 이지랄 부탁이라 이 몸이 친히 와서 무려 말까지 걸어주는데 이딴 식으로 해? 아무튼 지긋지긋하다 너도 참. 다 없던 일로 하자고 이지랄한테 똑바로 전해.”
호랑만 들릴 정도로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곤, 주변을 의식한 듯 다시 허리를 펴 세상 인자한 웃음을 호랑에게 짓더니 교실을 나간다.
고등학교에 올라와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아니 그렇다 믿으려 그렇게나 애써왔던 옛 순간순간의 혼자된 호랑이들이 무너지고, 다시 한번 그때 무리에서 꺼지라던 저 놈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심장으로 내려 꽂히는 고통이 느껴진다.
호랑의 몸은 그때 그날처럼 자리에 굳어버렸다. 하지만 머릿속 철학자 100명이 기억하는 그 어린 날의 호랑의 기억이 스멀스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