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 글자를 쓸 수야 있겠지만,
그렇게 호랑은 어린 본인이 감당하기엔 버겁기만 했던 머릿속 생각들을 연습장에 하나하나 이야기를 펼쳐가며 행복해하고 있었다.
그래, I 다운 것.
이호랑 다운 것을 찾아가는 느낌이었달까?
칠흑처럼 새까만 절벽에 떨어졌지만
한없이 얇은 수천수만의 연필 자국으로 하얀 빛을 그려 넣는 그런 느낌.
하지만, 호랑이 어렸기 때문이었을까?
조금은 순진하게도 호랑은 그 연습장이 절대 본인만 볼 수 있는 마법의 노트쯤으로 믿었던 것 같다.
어쩌면, 학교에서 모두가 본인에게 관심이 없으니, 이런 본인의 연습장도 당연히 관심이 없을 것이라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 비밀 노트에는 호랑 본인의 머릿속 생각들과, 마음 속 감정들이 너무나 솔직하게 기록되어갔다.
당연히 그 주제는 다양했고, 그중에선 언니 지랑에 대한 이야기, 무리 이탈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맘때 아이들이 한 번쯤 생각하는 왜 나는 이모양인가, 세상은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엔 언니를 따라가지 못하는 본인과 그렇게 본인을 낳은 부모님, 특히 아빠에 대한 불만과 원망이 적혔다. 언니와 달리 본인의 성향은 아빠를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맘때 아이답게 그 이야기는 대체로 아주 신랄한 표현들로 노트를 가득 채웠다.
"언니랑 똑같이 생겼는데 나는 왜 이모양일까..나만 아빠 닮아서..
확 없어져버렸으면 좋겠어.."
그 맘 때 언젠가 호랑은 자신만 볼 것이라 믿었던 이 비밀 노트에 이 글자들을 적었다.
그리고 이 문장을 끝으로 비밀노트는 갈기갈기 찢겨졌으며, 호랑은 두 번 다시 글을 쓰지 않겠노라고 두 번째 나무에게 울부짖었다. 할수만 있다면 다 태워버리고 싶었다.
어린 마음에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말이었다.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존재가 아빠인지, 아니면 호랑인지..글을 쓴 본인도 알지 못한 단순한 글자들의 나열일 뿐이었다.
다만, 그 아이가 몰랐던 건, 그 일기를 쓴 다음 날, 아빠가 회사 건설작업 중 추락 사고를 당해 의식불명인 상태로 병원 응급실로, 그렇게 중환자실에 온갖 의료기기를 몸에 붙인 채 누워있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 아이의 잘못이 아니다.
당연히, 그 아이의 노트에 그 한문장 때문도 아니다.
당연히, 그 아이가 자기 때문이라고 자책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 아이는 감정이입에 취약한 아이였고,
그래서, 그 아이는 유일하게 글쓰기에서 쉼을 얻던 아이였으며,
그렇게, 이제 본인의 글 때문에 아빠가 잘못되었다는 상처를 받게 될 아이였다.
물론 기적적으로 아빠는 의식을 회복했지만 후유증은 컸다. 그리고 호랑에게 그 댓가는 컸다.
그 마지막 문장이 연습장의 마지막이었고,
그 이후 호랑이는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았다.
아니 쓸 수가 없었다.
단 한 명이라도 본인으로 인해 상처받는 누군가가 생긴다면,
단순히 본인의 고통-감정이입을 쉽게 한다는-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런 짓을 하는 그런 사람은 절대 못되는 게 바로 호랑i였다.
‘아무나 글자를 쓸 수 있지만, 그 글자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결국 글을 쓰지 않게 된 호랑은 무리의 이탈을 경험했을 때보다 더욱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렇게 마음의 문을 닫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아이가 된 듯이.
그리고 또 한 가지 변한 건 호랑은 그 이후 안경을 쓰지 않게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안경을 쓰고 안 쓰고 시력 차이가 큰 것은 아니었다. 안경을 쓰면 세상이 좀 더 분명하게 보였을뿐. 하지만 호랑은 이제 그 안경을 쓰지 않는다.
자신이 없어졌다, 세상을 선명하게 볼 자신이.
안경을 쓰면 선명한 세상이,
그 세상 속 사람들의 울고 웃는 모습이,
내 눈을 통해 내 안으로 들어와 내 마음을 지독하게 휘둘러대기만 해서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졌다.
‘그냥 세상을 흐릿하게 보는 게 낫지..
안 볼 수 있는 건 안 보고, 피할 수 있는 건 피하며.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모두가 의식이 없이 기계음만 삑삑대는 중환자실 안 세상에서, 처음 보는 헝클어진 아빠의 모습을 눈물에 채운 채 옆에 앉아 엎드려 울던 호랑은 다짐했다.
아무도 호랑의 마지막 노트 안 마지막 문장을 알지 못했기에 아무도 호랑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줄 수 없었다.
하지만, 세상 아무도 모른다해도 호랑 본인이 알고 있다는 것, 그게 너무 컸다.
‘난 절대 보여주기 위한 글 따위 쓰지 않을 거야.’
버스가 멈춘다. 손가락으로 이어폰을 무심히 뺀다.
Song request 음악이 한순간 사라진다.
살며시 눈을 뜬다.
호랑의 흐릿한 눈에 세상이 아직도 차가운 빗줄기로 흐려져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