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아빠의 마지막 순간의 믿음 중 하나는 이랬을 거야.
'내가 없어도, 내 가족이, 내 동료가, 내 친구가, 그렇게 내 주변인들이
남게 될 아내와 두 아들을 살펴주겠지.'
아니,
아빠 그거 틀렸어.
아빠가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아빠의 가족, 아빠의 동료, 아빠의 친구라고
어릴 적부터 내게 웃어주던 이들은
제일 먼저 엄마와 형과,
그리고 내 등에 칼을 꽂더라.
아, 너무 그럴싸한가?
그럼,
‘가장 먼저 돌아서더라.’
아빠,
이건 몰랐지?
몰랐을 거야.
아빠 같은 사람이 그들이 그럴 줄 알았으면
아빠의 마지막을 그렇게 맞이했을리 없으니까 말야.
아빠가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아빠의 장례식 두 번째 날 저녁쯤이었나?
그때쯤 그 사람이 왔어.
아빠의 마지막 순간에 아빠를 불구덩이로 밀어 넣었을,
아빠의 죽음에 누구보다 깊게 관여되어 있을 그 사람이.
내 눈엔 그 슬픈 순간에도 세상 예뻤던 하얀 국화를 아빠의 젊을 적 사진 앞에 눕히더니
가지런히 손 모아 절을 하더라. 아니, 절을 했던가? 기도를 했던가?
그때만 해도 나는 그 사람이 아빠에게 그런 사람인줄 몰랐어서
그저 조문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말았지.
미쳤지, 나도.
그 사람 때문에 아빠가 그렇게 된 거란 걸 알았다면
그 하얀 국화가 새빠알간 핏물로 물들을 때까지 패 죽였을 텐데.
아, 그리고 그 사람 주변으로
아빠가 믿었던 아빠의 동료라는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붙어 다녔었어.
응,
어릴 적에 나 귀엽다며 아빠 옆에서 웃으며 만원 이만 원씩 주시던 아저씨들 말야.
그 아저씨들이 그 사람 주변에 잘만 따라다니더라.
그리고 그중 몇몇 아저씨는 장례식이 끝나는 날까지도 엄마와 형과 내 곁에 머물러주었어.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어.
난 아저씨들을 믿었으니까.
아빠가 마지막 순간에 그랬을 것 같듯이 말야.
뭐,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리고 장례식이 끝나고,
곁에 머물러 주던 그 아저씨들이 한 말이 뭐였는지 알아?
"조의금이 넉넉히 들어온 것 같으니, 아빠가 빌려 간 돈 내놔."
"니들 이렇게 클 때까지 돈 들어간 거 중 우리 몫도 있으니 내놔."
뭐, 시간이 많이 흘러 정확하진 않겠지만,
결국 저 말이었지.
아빠의 마지막 바람대로
그 동료들이 아빠의 가족이었던 엄마와 두 아들을 돌봐주긴 했지만,
아빠의 마지막 바람과 달리,
그들의 목적은 분명하더라.
돈.
더 최악인 건,
그 금액이 몇십만 원, 몇백만 원 정도로 별로 크지도 않았다는 게, 남은 엄마와 형과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드는 것 같았어.
그래, 솔직히 더러워서 내가 한두 달 죽어라 알바해서 그 더러운 돈 주고 말고 싶었어.
아빠 목숨과 비교도 안 될 얼마 되지도 않는 잘난 그깟 돈 말이야.
근데 안되더라.
그렇게 그 사람들 돈을 주면, 아빠가 은행권에 지고 있던 빚까지 모두 남은 가족이 변제해야 한대.
이 나라 법이 그렇대.
사람이 죽고, 누구보다 믿었던 이들이 칼을 꽂아대는데도 내 마음대로 하면 안되는 게,
그게 세상이더라.
아빠가 어릴 적 부터 내게 알려줬던 그 세상이 이 세상이 맞는걸까?
세상이 변한건지, 내가 변한건지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어.
아빠도 몰랐지?
아빠가 죽으면, 아빠의 재산도 빚도 남은 가족이 무조건 상속 받아야 하는 거.
다만, 빚보다 재산이 많으면 한정승인이라고 해서, 받은 재산만큼만 빚을 상환하고 나머지는 없어지진 않지만, 남은 가족 중 누군가가 죽을 때까지 안고 살아야 한다는 거.
이건 몰랐을 거야 아빠.
그저, 아빠 이름으로 된 빚이었으니까 아빠만 사라지면 되겠다고 생각했겠지?
그렇게 철두철미하던 사람이 왜 마지막 그때에는 이런 거 안 알아봤을까?
지금도 좀 의아해.
"법대로 하세요. 소송 거세요."
그래서 나는 핏빛 국화를 온몸에 꽂아주고 싶었던 아빠의 그 잘난 동료, 어릴 적 내게 웃어주던 삼촌들에게 이 말밖에 할 수 없었어. 내가 그 사람들 돈을 변제하면, 한정승인에 따라 은행권에 진 빚까지 모두 상환해야 하게 될 수도 있다잖아. 근데 그만큼 큰 돈은 당연히 없었지. 그래 그 망할 ‘당연히.’
그 이후로 나는 아빠가 우리를 먹여 살리느라 지었을 그 다양한 "상대방"들과의 빚더미를 처리하느라
내용증명도 수십번 받아보고, 우체국 가서 또 보내도 보고,
법원에 가서 생전 처음 보는 판사님 앞에서 법원 판결도 받아보고.
그렇게 어찌저찌 살아내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나 흘러있네.
그리고 시간에 먼지처럼 흩날려져 간 그 잘난 "상대방"들은
돈도, 아빠도 다 잊었는지 이젠 연락이 없어.
다행인걸까.
아니, 잊진 않았겠지.
그들에겐 동료였던 누군가보다 중요한 돈일 테니까.
그저 법적으로 받을 수 없다는 걸 알아서 가만있는 거겠지.
그렇게 나는 인생의 한 가지를 깨달았어.
제일 가까웠던 사람이, 내가 없어지면 제일 먼저 등에 칼 꽂는다는 거.
그리고 누구와도, 특히 가까운 사람일수록 돈 거래 하면 안된다는 거.
시간이 흘러도, 이건 잊히지 않는 건 어쩔 수가 없나 봐.
아!
그리고 아빠가 몰랐을 더 최악은 뭔 줄 알아?
아빠의 엄마, 아빠의 동생들.
그러니까 내겐 할머니, 그렇게 내겐 작은 아빠, 고모였던 그들도
그 동료들과 똑같이 하더라.
아빠 잃은 어린 새끼들과 그 어미가 혹여나 도와달라 손을 내밀까 두려웠던지
차갑게도 인연의 끈을 끊어내더라.
당사자인 나는, 엄마와 우리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는데 말야.
다들 먹고 살기 힘들어서 그랬겠지, 하고 말았어.
그래야지 어떡해.
이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해줘야겠다.
아빠가 믿었던 마지막은 그렇게 산산조각 났어.
그렇게,
아무 의미도 남기지 못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