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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양c May 30. 2022

Ep19. 묵직하고 진한 회장실 문이 닫혔다.

변 회장과 주 과장. 그리고, 그래서.


".. Well, that's all I have today and thanks for your listening and.. well, hope to see you all again through a good opportunity very soon. thanks."


"이거는 일단 최종에 올려."

아인의 영어면접발표 순서가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면접장에 나타난 변 회장이 말했다.


일종의 고약한 취미랄까.

변 회장은 지원자들에게 본인이 회장이라는 것을 숨긴 채, 불쑥 신입사원 면접장에 잘못 들어온 척 나타나 지원자들 중 한두 명을 최종 임원 면접에 지목하는 기괴한 취미가 있었다. 아인의 면접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변 회장은 그때의 그 아인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글쎄.. 나이는 변 회장의 자식 또래쯤 되었을까. 죽어도 이 회사는 물려받지 않겠다는, 이미 본인 스스로 자신의 커리어를 확실히 개척해나가고 있어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론 후계 작업을 더 강요할 수 없어 서운했던, 그리고 특유의 당당함마저도 변 회장 본인의 자식을 참 닮아있던.

그것이 변 회장이 기억하는 면접장 주아인의 첫인상이었고, 참 빛나보였다.


변 회장은 사실 다시는 "주"씨 성을 가진 사람을 믿지 않겠다 다짐했던 적이 있었다. 누군가에겐 사소한 것일 수도 있지만, 회사 창립 시기 공동창업자로 이름을 올릴 만큼 신뢰했던 변 회장의 동료가 "주"씨였고, 불과 아인의 입사 몇 해전까지만 해도 화물 운영 전체 총괄 이사로 변 회장이 누구보다 의지했던 동료였던 사람.

하지만 변 회장을 포함한 회사 모두를 속인 채 해외 지점과 비밀리 결탁하여 회사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갔던 배신자, 그렇게 변 회장 스스로 본인의 팔다리를 잘라내는 심정으로 퇴사시켜 버릴 수밖에 없었던 그의 성이 "주"씨였기 때문이었다면 우스운 이야기가 될까.


그럼에도 주아인이라는 이름의 너무도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청년을 면접장에서 처음 본 순간, 본인의 자식이 채워주지 못하고 있는 경영상의 아쉬움을 달래줄지도 모른다는 알 수 없는 기대를 품었더랬다. 그저 변 회장이 그렇게 믿고 싶었을 뿐일지도 모르지만.. 물론 변 회장의 눈엔 당시의 아인은 아직 한참 많이 미숙하고, 어떤 면에서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여, 그렇게 아직도 사회생활에 많은 풍파가 필요해 보였지만, 그런 모습조차 젊은 날의 본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청년.


그래서였을까?

당시 본인이 신뢰하던 몇 안 되는 직원이던 서 부장, 설 팀장이 아인을 반대했을 때도 무조건 최종면접까지 올리고, 변 회장 본인이 직접 1:1 면접을 통해 굳이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고 그렇게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합격시켰다.


"자네는  그렇게 항상 기운이 없나?"

최종합격 후 변 회장이 신입사원 아인에게 출근길에 거의 매일 물었던 말이다.

변 회장으로서는 임원진 대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뽑았기에 기대가 컸던 신입 주 사원이 매일 아침 거의 울상인 표정으로 아무런 기운 없이 파티션에 숨어만 있는 것처럼 보여 답답함을 감출 수 없었달까?


"이런 기회에 해외 매니저들이랑 대화도 좀 하고 그래야 경험이 쌓이지. 자네 영어 좀 하잖아."

그리고 언젠가는 유럽계 항공사의 사업을 따낸 기념만찬식에서 변 회장이 그동안의 답답함을 만회라도 해보란 듯이 주 사원을 몰아붙인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아인은 이상하게도 자세를 극도로 낮추고, 본인을 드러내길 꺼려했다.

변 회장은 본인의 자식이 경영자로서 채워주지 못하는 아쉬움을 아인을 통해서 대신 달래고 싶었던 것 같고,

아인의 입장에선 당시만 해도 설 팀장, 오 차장이라는 쟁쟁한 상사 앞에 움츠리고만 있던 신입이라 회장의 관심은 그저 큰 부담이었을 뿐이리라.

물론 만찬식 저 밸런타인 30년 산이 모두 비어져갈수록 그들에겐 안중에도 없는 일이 되었겠지만.


하지만 이후로도 변 회장은 아인을 눈여겨보았다. 기본적으로 '필요 없으면 버리면 그만'이라는 차가운 자본주의 논리로 가득하게 변해버린 변 회장이었지만 아인에겐 애착이 갔고 그에 비례하여 기대가 커져갔다.


아인도 초반에는 회장의 티 날 수밖에 없는 관심이 부담스럽고 그러면 자연히 따라올 수밖에 없는 직장 동료(?)들의 가시 돋친 눈총이 따가워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본인의 고민도 나름 정제된 수준(?)에서 변 회장과 소탈하게 나누기도 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드러나는 개판의 설 팀장의 부족함을 메꾸며 변 회장과 이 회사에 일말의 보탬이라도 되고자 성실히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래서.

변 회장과 주아인.

큰 나이차, 세대차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나름 보이지 않는 끈끈한 직장 관계를 이어갔다.

무심한 듯 가까운. 아닌 듯 하지만 그러한.



"괜찮으십니까 회장님"

본인의 능력을 증명이라도 하듯 어느새 차분한 평정심을 되찾은 함 전무가 말했다.  

그 옆에는 아직 놀란 눈을 꿈뻑이며 어쩔 줄 몰라하는 서 부장이 앉아있다.


"그래.. 쿨럭.. 주아인이 사표를 냈다고..? 쿨럭쿨럭. 보고가 안된 건가? 나만 모른 거야? 함 전무도 몰랐고?"

갑작스레 나는 기침을 참으며 변 회장이 말을 이어갔다.


"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 과장만 따로 불러 조금만 더 버티면 좋은 날 올 거라고 그렇게 격려를 해줬는데.. 개인적으로 좀 실망스럽습니다.. 회장님"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함 전무가 차분히 답했다.


"과장 승진시켜준 게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설 팀장이 승진 제안한 거 보면 주아인이가 퇴사 협상 조건이라도 내 걸었다는 건가?"


그리고 이어지는 정적.

창 밖 다른 빌딩에서 반사된 찬란한 햇살은 왜 이 회사로는 들어오지 않는 걸까. 뭐가 잘못된 걸까?

창밖을 고요히 응시하던 변 회장의 머릿속에 뜬금없는 생각이 스쳐갔다.


변 회장은 언젠가 이런 상처는 이제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아끼던 직원의 일방적인 퇴사 선언과 협상 조건. 그 내용이야 차치하더라도,

그 선언 자체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적응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변 회장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쯧.. 역시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

변 회장은 생각했다.


"주 과장 오늘 출근한 것 같은데, 들어오라고 할까요 회장님"

함 전무가 정적을 깨며 말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차분함을 유지한다. 함 전무를 회사 내 탑쓰리로 올린 강점은 이런 것 아닐까.

임원진이 그 자리를 차지한 데에는 어떤 이유든 반드시 그 이유가 있다.

그것이 탁월한 능력이든, 싸바싸바 비굴함이든, 갈굼을 참아내는 인내심이든.


"흐음.. 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일단 둬보지. 설 팀장이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어떻게 흘러가나 한번 보자고. 주아인이한테도 일단 모른 척하고 있고. 내 필요하면 부를 테니. 일단..나가봐요들."

회장이 뭔가 결심한 듯 말했다.


끼익- 탁.

묵직하고 진한 회장실 문이 닫혔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서 부장. 그의 걸음은 해외영업 3팀으로 직행한다.

설 팀장은 자리를 비웠다. 설 팀장은 매번 어딜 저렇게 가있을까- 하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물음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도 잠시.

무슨 생각인지 모니터를 멍하니 보고 있는 주 과장이 보인다.

나름 친하다 생각하는 주 과장인데 오늘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아니 내가 쓸쓸한 걸까?

그를 부른다.

서 부장의 표정 때문이었을까?

주 과장의 얼굴에 갑작스레 서 부장의 당혹감이 옮겨진 것 같다.


"주 과장, 잠깐 나 좀 보자."

눈빛은 나름 감춘 듯 하나, 떨리는 목소리는 감추지 못한 서 부장의 목소리가 아인에게 닿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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