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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양c Jun 02. 2022

Ep20-1. 뭐지 저 신박하게 정신 나간 노인네는?

아인과 변 회장의 첫 만남.



'흐음.. 잘 안된 건가? 왜 저렇게 씩씩대지?'


여느 때와 달리 씩씩대는 호흡을 몰아쉬며 사무실에 들어오는 설 팀장을 보며 아인은 생각했다.

출근길에 설 팀장이 회장실에 들어가는 것을 봤기 때문에 오늘인가 보다 하는 설렘과 기대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아인에게 회장실에서 거의 탈출하다시피 나오는 설 팀장의 모습은 주 과장 CEO 만들기 프로젝트는 바사삭 부서졌다는 통보를 떠올려주기에 충분했다.


"나 잠깐 나갔다 올 테니 급한 전화 있으면 연락해."

설 팀장이 도망치듯 자리를 비웠다.


'뭐가 어떻게 됐는지 말이라도 해주지 늘 저런 식이라니까 참나..'

한숨이 푹푹 났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래도 회장님이랑은 말이 나름 잘 통했다고 생각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회장님이라..’

그렇게 문득 변 회장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뭐지 저 신박하게 정신 나간 노인네는?' 

그게 변 회장의 첫인상이었다.

무더웠던 7월의 신입사원 면접 날. 면접장엔 탐욕스럽게 설정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한 에어컨들이 있는 힘껏 애쓰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무척 더웠다. 아니 모든 지원자는 더웠겠지?

‘역시 풀 정장은 덥고도 덥구나. 다른 사람들은 안 덥나? 말이라도 걸어볼까? 아니지. 그냥 있자.’

떨이고 긴장되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다음번 면접장 들어갈 차례라 대기실에 다른 지원자들과 쭉 앉아 기다리고 있는데 그 사이로 거렁뱅이같은 바지에, 되지도 않는 컬러로 매칭한 카라 반팔티. 콧대가 낮아서인지 줄줄 흘러내리는 안경테와 슈퍼마리오처럼 기른 어색한 콧수염. 의심할 여지없이 70대로 보이는 노인과 이상하게 붉게 상기된 얼굴색. 그리고 대놓고 면접 대기자들을 하나 둘 뚫어지게 쳐다보는 눈동자를 가진 이상한 노인.

'여기는 건물도 좋던데 경비분들은 잡상인 제제도 안 하는 건가. 저런 정신 나간 노인이 막 돌아다니게 그냥 두다니.여기도 노답이구나 참.'


"78번부터 83번까지 들어가실게요. 78번 주아인 님부터 들어가서 왼쪽부터 차례대로 앉으시면 됩니다."


'아 하필 첫 번째 자리네..'

언제나 면접장 입장은 숨 막힌다. 그리고 첫 번째 면접순서라면 숨이 턱턱 막힌다. 애써 처음에 하는 게 낫다고 믿으려 애쓰겠지만..

그렇게 알 수 없는 노인의 부담스러운 눈빛을 애써 뿌리치고 면접장에 입장했다.


.. Well. that's all I have for you today and thanks for your listening and.. well, hope to see you all again through a good opportunity very soon. thanks."


거의 대본처럼 외워온 영어 자기소개와 질의응답을 마쳤다. 예상했던 질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면접 질문이라 그래도 수월하게 영어로 대답할 수 있었던 것 같아 다행이다.

다른 면접자들도 이렇게 준비하지 않나? 다 외우는 거지 뭐. 네이티브가 얼마나 있겠어? 하는 조금은 여유로운 생각을 하며 대답을 마치는 찰나, 갑자기 그 신박하게 정신 나간 노인이 면접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리고 아인을 가리키며 흥미롭다는 듯 툭 던지는 한마디.


"이거는 일단 최종에 올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면접장에서 면접자들은 다들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마치 이런 일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듯이 눈앞 면접관들이 말한다.


"78번 말씀이시죠? 알겠습니다 회장님"


'78번? 나? 날 뭘 올린다는 거지..?  응? 회장님??!'


그렇게 이상했던, 하지만 강렬했던 변 회장과의 첫 만남 이후 나는 최종면접에서 그와 여러 가지 대화를 내 예상보다 오랜 시간 했다. 어떤 질문과 대답이 오갔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어렴풋한 기억은 내가 미리 준비했던 예상 질문에 대한 대답들, 특히 영어로 답해야 했던 것들은 그 앞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무척 독특했던 최종면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당당히 합격했다.


'아니지.. 당당히는 아니었지. 서 부장님도 설 팀장도 나를 다 떨어뜨리려고 했다고 했으니까.. 근데 변 회장이 무조건 합격시키라고 했다는 말을 입사하고 얼마나 많이 들었던지..' 아직도 이유는 모르겠다. 준비해 갔던 면접 대답들이 기억도 안 날정도로 엉망이었던 기억이었는데, 어떤 점이 그의 마음에 들었을까? 세상은 역시 알 수 없는 일 투성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때부터 나는 변 회장에게만큼은 언제까지나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던 것 같다. 그것이 회사일이든, 인간 대 인간으로서든.


신입시절 나는 내가 있는 사무실에 제일 먼저 출근해서 고요한 사무실에 혼자 앉아 이런저런 생각하는 걸 즐겼고, 또 좋았다. 그 고요한 사무실에서 흥미로웠던 것 중 하나는 회장실을 마구 들락날락거려도 아무도 모른다는 은밀한 재미. 장담하는데 회장님 빼고 내가 제일 많이 그 방에 왔다갔다 했을 것이다.


회장의 의자에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보기도 하고, 회장실 테이블에서 오갔을 임원진의 대화들도 상상해보고. 뭐 그런 거.

음.. 단순한 신입사원의 호기심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회사에 가장 높은 위치에 앉아있는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살까?


하지만 딱히 인상적일 건 없었던 것 같다.  

어떤 종류인지 가늠되지 않는 책상 위 많은 약 봉투들과 누가 봐도 특정 성향을 드러내는 신문과 매거진들. 아! 언젠가는 저 그림에 액자를 하나 만들어드려야겠다-생각이 들었던 창문에 아무렇게나 기대어있는 그림도 있었다. 그리고 삐뚤어진 네모 벽시계도 열심히 본인의 일을 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아침 고요한 그 방에서 아무도 모르게 회장실을 오가면서 삐뚤어진 시계 각을 맞춰놓고, 창문 환기를 해두고, 건조할까 가습기 물을 갈고, 지난 신문들을 버리고.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흔한 아버지 또래 직장인의 그 방에 있으면 변 회장의 생각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했던 지금 생각하면 꽤나 귀여운 신입시절이었다.



Ep20-끝. 소울리스좌가 말했다.

"영혼이 없다고 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건 아냐.”


그렇게 자유로운 영혼처럼 홀로 있는 사무실을 떠돌아 다니며 변 회장 아니, 이 회사에 대한 애정이 무럭무럭 자라나던 신입시절이었지만, 가끔은 회장의 막무가내 관심이 무척 부담스러웠을 때도 있었다.  

예를 들어 그렇게 애정 어린 손길로 회장실 방을 하나하나 정리하곤, 내 자리에 앉아 9시 땡! 이제 업무 좀 시작해볼까 호기롭게 모니터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데 저 멀리 회장이 출근하면서 한소리를 한다.  

그것도 날 콕 집어서.


"자네는  그렇게 항상 기운이 없나?"

신입사원은 항상 에너지가 넘쳐야 하고, 항상 웃음 짓고 있어야한다는 저 꼰대 같은 생각.

저 말을 들을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뭐가 저렇게 맘에 안 드는 걸까 하는 원망으로 가득찼다.

신입사원이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아도, 못하고 있는 것 같아도, 그들은 그들 나름의 이유로 항상 바쁘다. 회사 업무를 따라가기 위해서든, 조직에 적응하기 위해서든.


아! 요즘 소울리스좌가 유행이던데. 아무 영혼 없는 말투와 표정과 목소리로, 본인의 일을 착착착 잘만 해내는 사람. 그들을 소울리스좌라고 부른다고.

그리고 그분이 한 유명한 말이 있다.


영혼이 없다고 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응. 이건 너무나 명언이라 큰 따옴표로 소리쳐줄 필요가 있다. 너무 공감했다.  


영혼이 없고, 기운이 없어 보여도,
나는 업무를 좋아했고, 이 회사를 애정 했다.


도대체 그들은 월 백 이백 삼백 주면서

어떻게 영혼까지 갈아 넣길 기대하는걸까?


또 한 번은 그런 적도 있다.

지금은 전염병 때문에 거의 없어졌지만 당시만 해도 연중행사로 해외지점의 총괄 매니저들이 큰 사업을 따내면 특급호텔에서 기념 만찬식을 나름 성대하게 열었다. 흔치 않은 호텔 디너를 맛볼 수 있는 행복한 생각에 만찬장을 떠다니던 내게 회장은 늘 말했다.

"이런 기회에 해외 매니저들이랑 대화도 좀 하고 그래야 경험이 쌓이지. 자네 영어 좀 하잖아."

만찬장+외국인+술+회장+나.

이 공식의 조합이 완성되기 무섭게 회장은 내게 저 말을 던졌다. 민망할 정도로 자주.

유학생활을 한 내가 영어 대화에 겁이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신입시절 서 부장님이었나 오 차장님이었나.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그 두 꼰대 중 하나였을 거다.  

누군가가 신입시절 열심히 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는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날 아껴주셔서 그런 말을 슬쩍해주신 것 같지만, 당시만 해도 나는 신입사원이 지 능력 믿고 너무 나대면 안 된다는 말로 이해했고, 그래서 매사 조심하려 노력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회장의 그 말 앞에 침묵했다.  

뭐. 회장은 그런 내가 맘에 안 들었는지 술을 줄창 먹였지만.

왜 그들은 그럴 때마다 한 마디씩 덧붙일까.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 줄 알지? 아끼니까 한잔 주는 거야."

이런 거지 같은 말이 꼭 따라온다.

아무튼 나는 회장의 저런 권유에 그저 '언젠가 내 능력을 보여줄 자리가, 그 기회가 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 망설이지 않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거의 독립투사급 마음가짐 아닌가? 후후) 온 세상 방방곡곡에 내 능력을 널리 이뤄 펼치리라!!'  

그래. 그런 조금은 오만한 생각만 품고 침묵하기 위해 술을 들이켰던 것 같다.



'쯧.. 그럴 때도 있었지..

나한테만 유독 그런 거 보면 회장님도 날 많이 아꼈다고 생각했는데..

설 팀장 저러고 나온 거 보면 뭐가 잘 안 된 건가?

임원진끼리만 CEO 자리 논하고 회장은 몰랐던 건가?'


회장실에서 거의 튕겨져 나오다시피 나온 설 팀장을 본 이후로, 아인의 머릿속은 신입시절 때의 모습, 변 회장과의 직장생활관계 그리고 최근 CEO가 되는 건가 날아간 건가 하는 생각들로 가득했다. 그렇게 복잡한 머릿속을 숨기려 애써 멍한 눈으로 모니터를 보는 척 멍하니 앉아있는데 갑자기 들려오는 서 부장의 부들부들 떠는 목소리가 아인을 가리킨다.


"주 과장, 잠깐 나 좀 보자."


그리고 직감적으로 아인의 뇌리에 박히는 한 가지.


'뭐야. 나 CEO로 가는 건가?'




계속.


이전 19화 Ep19. 묵직하고 진한 회장실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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