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소녀는 자신이 간절히 염원하던 서울 땅에 드디어 첫 발을 내딛었다. 각종 가재도구를 한가득 싣고서 도착한 곳은 청량리의 한 원룸. 소녀의 부모는 걱정스럽기만 하다. '눈 뜨고도 코 베인다'는 서울에 몸만 큰 어린아이를 떼어놔야 하다니.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어! 걱정 말고 가."
씩씩하게 말하는 딸을 뒤로하고 떠나는 길, 부모는 운전대를 잡고서 몰래 눈물을 훔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소녀도 마음이 어딘가 찡하다. 부모님 차 뒤꽁무니를 보는 게 이렇게 울렁거릴 일인가?
코끝 시큰한 겨울날,
그렇게 나의 첫 홀로서기가 시작됐다.
촌구석에서 올라온 말괄량이에게 서울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돌아갈 곳이 서울이라 신기했고 발길 닿는 곳마다 별천지였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던져진 내게, 홀로서기는 같이 살기의 끝이자 책임 지는 삶의 시작이었다. 깨워주는 이 없이 학교 가는 것, 집안살림, 바퀴벌레 잡는 것까지 크고 작은 일 할 것 없이 모두 내 몫이었다. 모든 일상은 도전이 되어 다가왔고 나는 꽤나 고통스러운 변태과정을 거치며 어른이 되어갔다.
혼자 살면서 생긴 습관이 세 가지 있다.
첫째, 의심부터 하고 보는 것. 능구렁이 같은 어른들에게 혼자 남은 햇병아리는 골려먹기 좋은 상대였다. 원룸 주인이 수도요금을 몰래 올려 받았을 때, 나는 땅 속 계량기까지 확인해가며 항의했다. 씁쓸하지만 의심하고 경계할수록 그들도 날 대우해줬다.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소녀는 점점 억척스러워져갔다.
두 번째 습관은 '괜찮은 척'하기. 손가락만 살짝 베어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던 내가 어느 순간 "괜찮다"는 말을 달고 살기 시작했다. 옛말에 기침과 사랑은 숨길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감기로 콜록거리면서도 부모님과 통화할 땐 신기하게 기침이 참아졌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몸이 아파도 속상한 일이 있어도 항상 괜찮아야 할 것 같았다. 나는 혼자 사는 어른이니까.
세 번째 습관은 혼잣말. 옆집 여자는 항상 식사를 마치면 "아 배불러~"하고 혼잣말을 했다. 처음엔 가벽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혼잣말은 관찰예능을 찍는 연예인들이나 하는 것 아니었던가?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 역시 텔레비전을 보며 "진짜 웃기다" 따위의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곧바로 부모님 침대로 슬라이딩해 재잘대던 시간이 꿈만 같았다.
어느덧 올해로 홀로서기 10년차다.역설적이게도 혼자 살며 깨달은 것은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다. 내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혼자 문제를 해결하고 혼자 끙끙 앓고 혼잣말을 하면서 비로소 알게 됐다.
어쩌면 그동안의 홀로서기를 향한 도전은 더불어 살기 위한 밑거름인지도 모르겠다. 20대의 내가 아등바등 내 한 몸 건사하기 위해 애썼다면, 30대의 나는 좀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 주위를 품을 수 있길. 어른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어른'이 될 수 있길. 끝없이 펼쳐진 인생이란 길 위에서, 나의 도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