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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륫힌료르 Mar 30. 2020

부산은 벚꽃이 빨리 핀다

마스크 사러 가는 길에 만난 봄

뛰-뛰-뛰.


평화로운 주말아침, 요란하게 울리는 재난문자 소리에 눈이 절로 떠졌다.

"타지역보다 벚꽃이 빨리 피는 부산,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꽃놀이를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아, 벌써 벚꽃 필 때가 됐구나. '방콕' 생활을 어언 두 달째 하다보니 벚꽃 핀 줄도 몰랐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건만 그간 일상은 몰라보게 단조로워졌다. 내 동선은 끽해야 회사와 동네 마트가 전부. 그래도 뭐, 방구석 '확찐자'가 되고 있는 것만 빼면 집순이에게 이 상황은 그다지 타격이 없었다.






그날도 나는 여느 토요일처럼 모자를 대충 눌러쓴 채 마스크를 사러 나갔다. 오늘은 좀 흐리군. 춥지도 덥지도 않은 게 산책하기 딱 좋다! 지독한 집순이ㅡ금요일에 퇴근하면 월요일 아침 출근할 때가 돼서야 집에서 나오는ㅡ에게 약국 가는 길은 나름의 즐거움으로 자리잡았다.

그런데 우와, 이게 무슨 일? 며칠 전까지도 아무 일 없던 곳에 벚꽃길이 펼쳐졌다. '타지역보다 벚꽃이 빨리 피는 부산'이라더니 진짜였나 보다. 어느새 팝콘을 틔운 벚나무가 "사실 나 벚나무였지롱~" 하는 것 같았다.

마스크 사러 가는 길이 이렇게 낭만적이라니. 지독한 집순이도 꽃길 앞에서는 마음이 동했다. 세상이 아무리 흉흉해도 때가 되면 꽃은 피는구나.


마스크 사러 가는 길, 동네 아파트 단지에 펼쳐진 벚꽃길


꽃 앞에서 셀카를 찍으려다가, 카메라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는 관뒀다. 마스크로 칠갑하고 다니니 얼굴의 반쯤은 보이지 않는다. 화장따위 안 하는 것은 물론이다.

문득 샤랄라한 원피스를 입고 벚나무 아래서 사진 찍던 일상이 소중했음을 깨닫는다. 20대의 마지막 봄을 추리닝에 마스크 차림으로 맞게 될 줄이야. 괜시리 작년 봄 사진을 들춰본다. (아, 이때도 화장은 안했었네. 그냥 내가 게으른 걸로...)






지나간 버스는 10분이면 오지만 지나간 봄을 다시 만나려면 1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은 때가 되면 피는 거였다. 굳이 멀리서 찾지 않아도 봄은 늘 곁에 있었다. 회사 앞에, 아파트단지에, 약국 가는 길에.

마스크 사러 가는 길을 꽃놀이 삼아 즐기며, '소확행'의 의미가 뭔지 진정으로 깨닫는 나날이다. 우리에게 희망은 있다. "그래도 봄은 오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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