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빛의 제국
작가 : 김영하
출판사 : 복복서가
올해 친해지게 된 언니의 인생책이라고 해서 읽게 되었다. 김영하 작가님의 나나파권(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과 작별인사, 여행의 이유를 재밌게 읽기도 했고 김영하 작가님이 사람들을 바라보는, 파고드는 시점이 마음에 든다. 언니는 내가 추천한 양귀자 작가님의 모순을, 나는 김영하 작가님의 빛의 제국을 읽게 되었다. (광교 교보문고에서 샀는데 재고가 딱 1권 남아있어서 뭔가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 책은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인생을 북한과 남한에서 반반씩 살게 된 주인공은 과연 어디 나라 사람일까. 북으로 돌아갈 것인가 모든 것을 알게 된 남한에서 살아갈 것인가. 나는 김기영인가, 김성훈인가. 북한의 질서를 따를 것인가, 남한의 질서를 따를 것인가. 하룻밤 사이 이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김기영을 보면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오래 산 외국인들, 귀화한 사람들, 혼혈 그리고 김기영 같은 스파이들.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우리나라에 오래 있었다고 해도 토종 한국인만이 가질 수 있는 시선, 감정들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겉모습이 외국인 같다면 사람들은 편견을 가지고 대한다. 전에 ‘소속감'에 대한 글을 쓸 때도 말했지만 많은 혼혈들이 정체성 혼란을 겪고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기분을 느낀다고 한다. 김기영은 외모만 한국사람이었을 뿐 속은 이방인과 다름이 없었다. 그랬던 그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던졌을 때 쉽게 답을 하지 못하는 장면이 안타까웠다.
변화를 거부하거나 방기할 자신감과 배짱이 있을 리 없었다. 그것은 이곳에서 태어나 살아온, 원주민들의 특권이었다. 83p
이 이야기가 굉장히 심오한 것은 죽음이 연관되어있기도 하다. 김기영은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기도 하고 직접 마주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죽음을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마 잊고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그가 하루아침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북에 돌아가더라도 살아남을지는 미지수이고 한국에 남더라도 자신이 죽인 것처럼 북한의 스파이들이 죽일 수도 있다. 아마 그는 진정으로 죽음 앞에 섰을 것이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회피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었고 그동안 회피했던 아내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나는 그때서야 김기영이 죽음을 제대로 마주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죽음을 통해 마리에게 자신의 밑바닥과 솔직함,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이 왜 이곳에서 마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깨닫는다. 그는 드디어 자신만의 질서를 세우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김기영이 선택한 곳을 알려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북한 간첩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을 때부터 김기영이 아닌 김성훈으로 주인공을 설명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 책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김성훈을 김기영으로 지칭한다. 그는 결국 이곳에 남는 것을 택했고 김기영으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서 정말 김기영이 되었다. 그는 다시 태어난 것이다. 김성훈이 아닌 김기영으로.
만약 이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평생 김기영은 마리에게 마음을 내어주지 못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고 마리는 계속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어쩌면 이 사건은 김기영에게 큰 행운이다. 그는 죽음의 낭떠러지에서 벗어났고 가정을 지켰다. 그리고 어쩌면 마리와의 관계도 회복했을지도 모르겠다. 회복을 하지 못했더라도 속은 시원하지 않았을까. 서로의 속내를 끄집어내었던 사건이 되었으니까.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김기영을 응원해주고 싶다. 그리고 자신만의 질서와 세계를 세우고 세상을 바라보게 된, 성장한 그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이제 이곳에 김성훈은 없다.
이 이야기는 ‘처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런 생각을 언제부터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녀는 자기 인생의 모든 처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28p
나는 누구일까. 정말 노수연이 맞는 것일까? 내 인생에서 어디쯤 와 있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나는 왜 살아있는가. 나는 정말 죽을까? 과연 우리는 늙는 것이 맞을까? 이 모든 것이 다 가짜는 아닐까?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있긴 할까?
죽음은 우선 사라지는 것이고 사라진 후에도 남는 자들을 지배하는 것이다. 31p
중요한 물건이라 생각해서 깊이 넣어두었던 것 같은데 그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274p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은 슬픈데,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어린 모습을 간직한 채로 늙어가기 때문이었다. 소년이 늙어 노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소년은 늙어 늙은 소년이 되고 소녀도 늙어 늙은 소녀가 된다. 31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