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독후감 11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by 노수연

책 :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작가 : 김영하

출판사 : 복복서가



이 책을 읽게 된 이유

사실 이 책은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님을 알게 된 후에 읽은 첫 번째 책이다.(공교롭게도 작가님이 처음으로 쓰신 장편소설이다.) 작가님의 언변에 빠져서 책을 읽어보고 싶어 졌고 작가님의 책 목록을 쭉 보다가 딱 멈춰 섰다. 나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나서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내 마음대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죽음 정도는 내가 원할 때 죽어도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던 마침 이 책 제목이 나를 사로잡았다. 당시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고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잘 몰라서 노트도 필사도 하지 않았다. 그 당시 엄청난 충격이었던 것은 기억이 나는데 정확히 내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래서 거의 4년 만에 이 책을 사서 다시 읽게 되었다.



자살청부업자

이 책에서 자살을 유도하고 도와주는 존재가 나온다. 이 존재는 죽음의 근처에 다가와 있는 사람들을 찾아서 설득시킨다. 한 가지 조금 아쉬운 점은 어떻게 대화를 나누는지는 묘사되어있지 않다. 그저 대화를 나눈 후 자살을 결정했다고만 한다. 그와 무슨 대화를 했을까. 이 존재는 어쩌면 내면의 죽음을 바라는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자살이 좋은 것이라고 설득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왜 그 좋은 것을 자신이 하지 않는 것일까. 왜 살기 위해 자살을 돕는 것일까. 굉장한 모순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일까?



도움을 못 듣는 사람들

사실 유디트와 미미는 자살한 것이 아니다. 그녀들은 끝까지 C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죽고 싶다는 말만 안 했지 살려달라고, 사랑해 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끝까지 처절했지만 C는 그녀들의 비명소리를 무시했다. 분명 그 신호를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척했다. 나는 C가 유디트와 미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장본인이라고 생각한다.(K도 마찬가지다.) ‘자살의 연구'의 독후감에서 말했던 투신자살 소동이 생각난다.


도와달라는 외침 (‘자살의 연구’ 독후감)

내가 알바를 하고 있을 때 밖이 소란스러웠다. 바로 자살시도(투신)를 하려는 사람 때문에 도로가 마비되고 소방차가 오고 사람들이 구경을 하느라 소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 사태는 3시간 동안 지속되다가 비명소리와 함께 ‘쿵’ 소리가 났다. 다행히도 에어매트에 떨어졌고 바로 응급실로 이송된 것처럼 들렸다. 그때 사장님은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저런 건 민폐야. 죽더라도 저렇게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면 안 되지 그리고 자살은 바보 같은 생각이야. 죽을 용기로 살아야지.’ 나는 ‘네’ 한마디만 하고 약간 무시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모든 사람이 자살시도를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에어매트가 설치될 때까지 안 떨어진 거 보면 죽을 용기는 없었던 거야.’ 그 사람들은 마치 비아냥거리듯이 말했다. 죽을 용기도 없으면서 그 난리를 쳤냐는 식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화가 났다. 왜 마음이 아픈 사람을 헤아려 줄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 사람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자신이 힘들다는 것을 얼마나 알리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그 사람은 죽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도와달라고 온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소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어느 면에서 그것은 치명적으로 불발된 ‘도와달라는 외침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79p(자살의 연구)


나는 자살이 단 한 번의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미 그들은 수차례 우리에게 말했을 것이다.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분명 주변인이 무시하고 사회가 무시했을 것이다. 우리는 자꾸 죽음에 대해 외면하려고만 한다. 결국 우리는 그들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고 우리들의 묵음을 자살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죽고 싶다고 말하는 자신을 잡지 않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서 자신을 ‘소설가'라고 칭하는 사람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싶다.



자살은 자살이 아니다.

원래 나는 자살은 나의 내면이 무너져서 자살해 버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자살은 자살이 아니다. 물리적인 살인 도구만 없을 뿐 모든 자살이 타살이라고 생각한다. 자살한 사람들의 책임은 바로 살아있는 사람에게 있다. 학교폭력을 하는 가해자들,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 많은 것들을 요구하는 어른들, 그리고 자살에 대한 심각성을 통계로서만 이야기하고 넘어가는 우리 모두. 우리는 살인자다. 그들의 죽음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고 공감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자신이 파괴되어 죽었다고만 생각한다. 최종적으로 파괴한 것은 그 자신일지 몰라도 그 몸과 마음에 금이 가게 만든 것은 우리들일 것이다. 우리는 C가 되지 말아야 한다. 남에게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물론 나도 그러지 않고 있지만 앞으로 노력해야지.


이렇게 보면 <파괴>에 나오는 자발적인 죽음을 행한 자들과 그들을 그 상태로 몰아넣는 자살안내자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를 비워놓은 채 큰 타자의 규범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끌려가거나 아니면 그렇게 만들어진 허구적인 환상체계 안에 갇혀 타자와의 소통을 거부하고 외면한 채 냉정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편으로는 유디트이고 유미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C이고 K이며 자살안내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처럼 주체를 상실한 채 살아간다면 우리는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자살안내자들을 만날 것이며, 그들에게 이끌려 죽음의 문턱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할 것이며, 그러다가 결과적으로 아무 흔적 없이 소멸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의 장면은 마치 얼마 앞의 우리 모습을 옮겨놓은 것 같이 불길하며, 이런 점에서 보자면 <파괴>는 우리 시대의 오감도이자 묵시록이다. 163p



자살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무게를 모른다.

아직도 내 주변인들은 내가 자살을 아주 깊게 생각했고 자해를 했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 이유가 있다. 대학교를 입학하기 직전에 내가 제일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촌언니에게 내가 우울증인 것 같다는 말을 했었다. 내 우울이 최고점을 찍을 때였다. 정말 용기 내서 말한 것이고 언니가 진지하게 임해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내 병을 이모나 우리 부모님에게 말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부모님께는 내가 스스로 죽고 싶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언니 나 사실 우울증인 것 같아.”


그러자 언니는 인상을 찌푸리고 입은 웃으면서 말했다.


“네가?”


나에게 이 말투는 굉장히 상처였다. 글이라서 잘 안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엥 네가 힘든 게 뭐 있다고?” 이런 뉘앙스였다. 나는 딱 그 단어를 듣는 순간 화제를 돌려 다른 이야기를 했다. 원래는 자해까지 했었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더 이상 말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렇게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대중적으로 사랑을 받던 노래는 아니라서 이 노래가 나오는 것이 신기했다.)가 나왔다.


“어? 이거 내가 좋아하는 곡인데. 안 유명한 곡이 나오네 우와 좋다.”

“거봐 내가 봤을 땐 너 우울증 아니야.”


거기서 나는 실수했다고 느꼈다. 괜히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겉으로 멀쩡한 사람이 우울증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그 이후로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이런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먼저 나에게 우울증이었다고 고백하는 사람에게만 했다. 나도 그랬다고. 그들도 역시 아무에게나 우울증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처럼 똑같이 상처받은 기억이 있었다.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하거나 소문을 내거나 안 믿는 사람들밖에 없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먼저 고백한 것도 아닌데 나에게 왜 말을 했을까. 나에게 우울증을 고백한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나도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어쨌든 이 자살과 우울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전혀 그 세계를 모른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들어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물론 아닌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그렇다.) 어떤 사람은 꾀병이라고도 생각하고 자신에게 겁을 주는 것이냐고 따지는 사람도 봤다. 그들은 심각성을 모른다. 그저 아무 말 없이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하면 되는데 그들은 꼭 말을 덧붙인다. 솔직히 엄청난 위로도 필요 없다. 누군가 자살 혹은 우울증 아니면 자신의 아픔에 대해 말할 때 그저 ‘내가 당신의 그 이야기를 진심으로, 진지하게 대하고 있습니다.’를 행동으로만 보여주면 된다. 나는 이렇게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그 아픔이 커 보이지 않더라도 그 당사자에게는 죽음보다도 큰 것일 수 있다. 그러니 제발 상대방의 아픔을 내가 감히 판단하지 말자. 그 사람이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면 힘든 것이다.



예술을 시작한 이유

백색 캔버스. 원시인이 처음 예술을 시작한 이유에 대해 어떤 사람은 이런 주장을 폈다. 그것은 인간 내부에 잠재해 있는 백색 공포 때문이라고. 텅 비어 있는 하얀 벽에다 낙서를 하고 번쩍이는 새 차의 표면에 칼로 흠집을 낸다. 가구가 없는, 그림 한 점 걸려 있지 않은 그런 방이 두려워 사람들은 채우고 또 채운다. 아무려나, 예술이 공포로부터 기인했다는 이 가설은 그림을 처음 시작하던 시절 그의 흥미를 끌었다. 근원을 짐작할 수 없는 내면의 두려움을 예술로 통어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으로 밥을 먹고살아야 하는 그에게는 작은 위안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는 가끔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나는 과연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93p


음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나는 혼자 있을 때면 조용한 것이 싫어서 항상 보지도 않는 영상을 틀어 두거나 음악을 듣는다. 백색의 공포와 비슷하게 고요 속에서 오는 공포 때문에 음악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싶다. 왜 우리는 계속해서 채우고 싶어 할까. 그리고 예술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들이 떠올랐다.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예전에 어떤 책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대충 이런 내용이 있었다. 주인공이 결정하지 못한 일을 두고 여행을 갔지만 결코 바뀌는 것은 없었다. 멀리 떠나가도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고 상황이 바뀌지도 않았다. 해결되지 못한 그 마음의 무게는 여전했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여행을 가더라도, 멀리 떠나더라도 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문장이 굉장히 깊게 들어왔다. 조금은 한탄스럽기도 하고 원망하는 것 같은 문장처럼 느껴진다. 이 진리는 절대 변하지 않기 때문에 더 안타깝다. 나는 이 ‘멀리 떠나가도'에는 여행뿐만 아니라 자살도 포함이 된다고 생각한다. 자살하면 끝인 것이지 문제가 해결되고 세상이 변하는 것은 없다. 그저 끝날뿐이다. ‘여행'이 아닌 ‘자살'로 회피하는 것뿐이다.


유디트는 이제 “멀리 다녀왔는데도 바뀐 게 없"음을 분명하게 확인한다. 또한 아무리 멀리 다녀와도 바뀌는 게 없을 것임을 뼈저리게 예감한다. 그녀는 그야말로 짙은 우울에 빠진다. 떠나는 것도 고통이지만 그렇다고 떠나지 않는 것은 더욱 고통인 상황에 처한 것이다. 149p



우울

텅 비어 있는 영혼을 거짓 충동들로 채워가는 존재들, 그 과정에서 혹여 구원을 꿈꾸지만 그 꿈은 헛된 것일 뿐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절망하는 존재들, 그래서 이곳을 떠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 떠나는 것은 더욱 고통인 존재들, 그것은 바로 지금 이곳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실존인 것이다. 150p


이 문장이 우울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랬다. 나는 현실에 대해 절망했지만 이곳을 떠날 수는 없었다. 나는 스스로 죽을 용기가 없다. 그때 깨달았다.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사실에 더욱 고통에 빠진 존재가 되어버렸다. 나는 이런 존재가 되어버린 후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태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하지만 금방 깨달아버렸다. 이 질문의 명확한 답은 없다. 이 현실은 어떠한 답도 내릴 수 없다. 그것이 삶을 더 고통스럽게 때로는 아름답게 만들었다. 하루에도 수십번 고통과 아름다움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어쩌면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

이 글을 보는 사람들 모두 일생에 한 번쯤은 유디트와 미미처럼 마로니에 공원이나 한적한 길모퉁이에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아무 예고 없이 다가가 물을 것이다. 멀리 왔는데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지 않으냐고. 또는, 휴식을 원하지 않느냐고. 그때 내 손을 잡고 따라오라. 그럴 자신이 없는 자들은 절대 뒤돌아보지 말 일이다. 고통스럽고 무료하더라도 그대들 갈 길을 가라. 119p


우리에게 우울과 자살충동은 아무 예고 없이 다가올 것이다. 멀리 왔는데도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절망할 것이고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가 올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고통스럽고 무료하더라도 내 갈 길을 갈 것이다. 이 구절에서 나는 무엇인가 위로를 받게 되었다. 누구나 일생에 한 번쯤은 그럴 것이라고 말해주었고 그것이 아무 예고 없이 다가올 것이라는 것도 알려주었다. 그리고 삶이 고통스럽고 무료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계속 살라고 담담하게 말해주는 것 같다. 나는 이런 위로가 좋다. 삶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고 매일 설렘이 기다리고 있다는 그런 식의 위로는 나에게 먹히지 않는다. 삶의 어두운 면을 인정하고 어쩔 수 없지만 우리는 계속 살아나가야 한다는 그런 말이 훨씬 진정성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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