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여행의 이유
작가 : 김영하
출판사 : 복복서가
김영하 작가님을 좋아한다.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 작가님이기 때문에 다시 책을 많이 읽게 된 지금 김영하 작가님의 작품들을 쭉 훑어보기로 했다. 알쓸신잡을 통해서 작가님을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에 ‘여행’이라는 키워드가 궁금했다. 말이 아닌 글로 풀어낸 작가님의 여행에 대한 생각들을 알아보고 싶었다. 항상 여행을 가고 싶다고도 생각하기도 하고. 아직 혼자서 떠나는 여행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더 호기심이 가는 것 같기도 하다.
여행은 슈퍼J(엄청난 계획형)이더라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오기 마련이다. 나는 지금까지 계획대로 살아본 적이 없다. 내 생각에는 어느 정도의 큰 틀의 계획은 필요하지만 자잘한 계획은 쓸모가 없다. 사실 계획을 세우는 것이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내 성향이겠지만 계획대로 하루가 굴러가는 것보다 갑작스러운 이벤트가 생길 때가 더 재밌다. 스트레스를 받는 때도 있지만 그런 날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예전에는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알고 싶었는데 지금은 평생 모르고 싶다. 완벽한 계획대로 인생이 흘러가거나 스포 당한 미래는 정말 재미없을 것 같다. 사람들은 남의 행복보다 슬픔과 아픔에 더 주목하고 공감한다. 모든 이야기에는 시련이 있다. 그래야 재밌는 삶이 된다. 요즘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재밌네’라고 말하는 것이 유행이라고 한다. 예측할 수 없는, 순조롭지 못한 인생(여행)이 재밌는 인생(여행)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여행에 치밀한 계획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행이 너무 순조로우면 나중에 쓸 게 없기 때문이다. 17p
계획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오는 그런 여행기가 있다면 아마 나는 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을 것이다. 20p
+안 좋은 일들은 결국 맛있는 안주거리가 된다. 특히 힘든 이야기들이 훨씬 맛있다. 그 맛있는 안주거리는 평생 무한리필로 먹을 수 있다. 먹어도 먹어도 맛있는 최고의 안주가 된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 능력보다 더 높이 희망하며, 희망했던 것보다 못한 성취에도 어느 정도는 만족하며, 그 어떤 결과에서도 결국 뭔가를 배우는 존재다. 25p
딱 지금의 나를 두고 하는 말 같다. 나는 내 능력보다 높은 대학에 희망했고 희망했던 것보다 못한 성취에도 지금은 만족하며, 결국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지금은 이 대학에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지경까지 왔다. 이곳에 오지 못했다면 평생 깨닫지 못한 것들이 많았을 것 같다. 나 자신을 마주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랑 대화를 한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자신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나도 그 친구도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기 때문에 공감했다. 잠깐 집 밖을 나갈 때도 누군가를 마주칠까 봐 눈치를 본 적이 있다.(특히 내 꼴이 말이 아닐 때) 그리고 혼자 있고 싶을 때 우연히 친구들을 만나게 되어 내 시간을 방해받은 적도 굉장히 많다. 그 친구도 그런 답답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여행을 가면 나를 아무도 모른다. 특히 해외여행을 가면 아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여행은 나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든다. 내가 예전에 ‘내가 살아있다고 해도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고 아는 척도 하지 않고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고 무시한다면 그것은 과연 내가 존재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넷플릭스 시리즈 ‘블랙미러’에서 범죄자에게 모자이크를 씌워버려서 평생 사람들과 말도 하지 못하고 누구인지 인식도 할 수 없는 상태를 생각하면 될 것 같다.(상상만 해도 정말 끔찍하다. 나는 정신적으로 고통을 주는 것이 더 그로테스크하다고 생각한다.) 작가님이 그림자 이야기를 하신 것과 비슷하다.
우리의 정체성은 스스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타인의 인정을 통해 비로소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184p
블랙미러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여행은 어느 정도 잠깐 내 존재를 지운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스스로의 편견에서 벗어나게 되는 그 순간이 인간에게는 꼭 필요한 것 같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201p
+나는 집 앞에 있는 중학교를 일부로 가지 않았다. 훨씬 먼 곳을 1 지망을 썼다. 초등학교 친구들이 그대로 중학교에 갈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집 앞의 학교를 두고 정말 바보 같은 짓을 했다. 하지만 이유는 분명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전학을 와서 친구들과 적응을 못한 나는 나를 아무도 모르는 친구들이 있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나의 존재를 지우고 다시 쓰고 싶었던 것 같다.
여행은 보통 일상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간다. 매일 보는 집, 직장, 학교, 거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다. 우리는 안정적인 것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학습된 것이고 본능은 그 반대 같다. 작가님의 말처럼 우리는 유전적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싶은 본능이 새겨져 있는 것 같다. 누구나 현실에서 달아나고 싶어 한다. 우리들은 짧은 여행을 통해 그 욕구를 해소한다. 어쩌면 여행을 사랑하는 인간들은 회피형이 아닐까?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 72p
유전자에 새겨진 이동의 본능. 여행은 어디로든 움직여야 생존을 도모할 수 있었던 인류가 현대에 남긴 진화의 흔적이고 문화일지도 모른다. 피곤하고 위험한 데다 비용도 많이 들지만 여전히 인간은 여행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104p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 248p
멜버른 한 달 살기를 할 때 나랑 친구는 공원에 자주 갔다. 그러다 우연히 한 강아지가 우리의 품에 안겼고 그 주인과 인사를 나눴다. 신기하게도 그분의 동생이 한국에서 살고 있다며 한국어를 조금 할 줄 아셨다. 그렇게 인연은 끝이 난 줄 알았다. 하지만 호주를 떠나기 전날 마지막으로 간 공원에서 그때 그 강아지가 내 품에 안겼다. 나는 그 강아지를 단번에 알아보았고 주인과 다시 인사를 나눴다. Jerry(강아지)의 주인은 Ilya였다. 내가 크루아상을 좋아한다고 말하자 일리야는 여기 주민들만 아는 크루아상이 맛있는 카페를 알고 있다며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무슨 용기였는지 모르겠지만 좋다고 따라갔다. 심지어 그날은 각자 좋았던 곳을 다녀오기로 한 날이어서 혼자 있었다.(그리고 일리야는 헬스트레이너인 남자다.) 정말 다행히도 구석에 있는 멀쩡한 카페에 도착했다. 그리고 일리야가 사준 맛있는 크루아상을 커피와 함께 먹었다. 우리는 거의 2시간 동안 수다를 떨었다. 영어도 할 줄 모르면서 내가 외국인과 편안하게 대화를 했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심지어 인생이야기를 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우울증에 걸렸고 살이 쪘지만 지금은 뺐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일리야는 진심으로 나를 위로해 주고 조언을 해주었다. 내가 20kg 뺀 사람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 후에도 인생을 대해야 하는 태도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멜버른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관광지를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것까지는 무서워서 가지 않겠다고 말했고 일리야는 아쉬웠는지 저녁에 우리를 초대했다. 우리 둘은 또 어떤 용기가 생겼는지 초대에 응했다. 약간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이 사람이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어쨌든 우리는 일리야에게 줄 제리의 옷과 편지와 꽃을 사들고 일리야의 집까지 찾아갔다. 일리야는 맛있는 맥주와 과일을 주고 피자를 직접 구워주었다. 그 순간이 정말 생생하게 기억난다. 일리야가 자신이 영어 선생님이 되어주겠다며 영어로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던 그 순간이 참 재밌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2번째 만남에, 그리고 하루 만에 친한 친구가 되었다. 밤늦게까지 떠든 우리는 트램을 타고 집으로 가야 했는데 일리야가 걱정된다며 트램을 타고 떠날 때까지 옆에서 지켜주었다. 정말 다행히도 따뜻한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진짜 미친 짓이다. 한국에 와서 부모님께 이 말을 했더니 엄청 혼났다. 모르는 사람 함부로 따라가지 말라고. 마치 유치원생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왜 겁도 없이 일리야의 제안을 받아들였을까. 김영하 작가님도 비슷한 경험이 있으셔서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나는 어쩌면 그저 낯선 이를 믿고 싶었던 것 같다. 세상은 아직 아름답다고 믿고 싶었다.
우리는 인생의 축소판인 여행을 통해, 환대와 신뢰의 순환을 거듭하여 경험함으로써, 우리 인류가 적대와 경쟁을 통해서만 번성해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달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지구의 모습이 그토록 아름답게 보였던 것과 그 푸른 구슬에서 시인이 바로 인류애를 떠올린 것은 지구라는 행성의 승객인 우리 모두가 오랜 세월 서로에게 보여준 신뢰와 환대 덕분이었을 것이다. 164p
+정말 신기하게도 일리야를 만났을 때부터 내 핸드폰이 고장 난 건지 데이터가 되지 않았다. 만약 그때 일리야를 만나지 못했다면 국제 미아가 되었을 수도 있다.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인 것 같다. 솔직히 이번 호주 여행이 아주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호주를 떠나기 전 날, 바로 이 하루를 위해 다녀온 것 같다는 생각 들었다. 이 경험 덕분에 하나라도 얻어걸린 알찬 여행이 되었다. 여행은 마치 책 같다. 책을 읽으면서 하나라도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으면 성공이라고 하는데 여행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호주 여행은 대성공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진격의 거인에서 지크가 살아야 할 이유를 알게 된 것과 비슷하다. 그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글로 써보니 나도 이에 동의하고 있었다. 여행이 곧 삶이라면, 행복했던 기억 하나쯤 있는 삶은 성공적인 삶이다. 나는 대학교에 들어오고 동아리에 들어오면서 ‘행복’을 직접적으로 느꼈다. 지금도 느낀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어서 내 인생은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많이 힘들었지만 이 순간을 한 번 더 경험하기 위해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정말 지크랑 동기화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원래 얻으려던 것(‘메이저리거 되기’)보다 더 소중한 교훈들을 얻었(거나 최소한 얻었다고 믿었)을 것이다. 어쨌든 살아남지 않았는가?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옆에 있고, 남 보기에는 보잘것없을지언정 평생을 들여 이룬 작은 성취가 있다. 인생과 여행은 그래서 신비롭다. 설령 우리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실패와 시련, 좌절을 겪는다 해도, 우리가 그 안에서 얼마든지 기쁨을 찾아내고 행복을 누리며 깊은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 26p
‘어쨌든 살아남지 않았는가?’라는 말이 마음속에 박혔다. 여행을 말하는 이 책 속에서 여행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곧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평생을 들여 이룬 작은 성취들을 함부로 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는 그것이 제일 소중하고 살아나갈 힘이 된다. 내 다음 행선지는 어디가 될까. 또 예측 불가능한 일들이 벌어지겠지. 재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