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페이스 그리고 무력감
올림픽 마라톤 4위를 기록한 선수이자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기자인 케니 무어가 달리기에 대해 쓰면서 ‘고통'이라는 단어와 연관 짓기를 꺼렸다는 게 떠오른다. “뜨거운 레인지 상판에 손을 댔을 때의 고통과는 다르다"라고 그는 썼다. “오히려 무력감이랄까. 견딜 수 없는 무게, 제어할 수 없는 두려움과 같다.” 멈춰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24p
-달리기 인류-
오래 그리고 빠르게 달리는 것(마라톤)은 사실 고통입니다. 그런데 이 고통은 평소에 느끼는 고통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저는 케니 무어 선수님이 한 말이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무력감'입니다. 특히 이 무력감은 오버페이스를 할 때 강하게 듭니다. 많이 뛰다 보면 아실 겁니다. ‘아, 지금 내가 오버페이스를 했구나.’ 그 이후부터는 느린 페이스로 뛰어도 굉장히 고통스럽습니다. 오버페이스를 하는 순간, 그리고 그것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 더 뛰고 싶어도 다리가 나가지 않습니다. 결국 오래 뛰지 못하고 멈추게 되는 거죠. “그럼 오버페이스를 안 하면 되잖아?”라고 하실 분들이 있을 것 같은데, 저도 오버페이스를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정말 ‘제어할 수 없는 두려움과 같다.’라는 말을 괜히 하신 게 아니에요. 저도 모르게 빨리 뛸 때가 있습니다. 내가 내 몸뚱아리로 달리는 것은 맞지만 스스로 제어하기가 참 힘들어요.
저는 첫 하프 대회를 나갔을 때 그 무력함을 느꼈습니다. 제가 첫 하프 도전이라서 2시간 반 이내로 완주만 하자고 목표를 정하고 대회를 나갔습니다. 그래서 중후반까지는 조금 빠르게 달려서 뒤에 퍼지더라도 완주는 할 수 있도록 계획을 짰습니다. 그래서 원래는 6분 30초 페이스 정도로 달리는 것이 맞지만 6분 15초 페이스로 17km까지 약간의 오버페이스로 달렸습니다. 그랬더니 나머지 4km를 제가 통제할 수 없게 되더라고요. 제가 느꼈던 신체적 고통 중에서 제일 심했습니다. 걷는 속도로 뛰지만 걷지만 말자는 생각으로 발만 구르면서 나머지 4km를 뛰었던 기억이 납니다. 4km가 이렇게 길고 멀었나 싶기도 했죠. 제가 ‘이렇게까지 멈추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아마 옆에서 같이 뛰어준 친구가 없었다면 저는 아예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친구(풀코스를 6번이나 뛴 친구입니다… 그것도 *서브 4...)가 옆에서 계속해서 응원을 해줬는데 저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그 응원이 들리지만 ‘파이팅’ 조차 말 할 수가 없었어요. 대회가 다 끝나고 대답 못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을 겁니다.(아마도?)
*서브 4 : 42.195km(풀코스)를 4시간 안에 뛰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힘들어 죽겠는데 친구는 옆에서 지루해하는 게 다 느껴졌어요. 핸드폰으로 연락을 하면서 뛰더라고요. 심지어 전화까지 했습니다. (제가 힘들어하는 걸 재밌어하는 것 같기도 했고요.... 진짜 얄미워.) 첫 하프를 같이 뛰어준 아주 고마운 사람이긴 하지만 그때는 좀 많이 얄미웠습니다. 아직도 그 친구는 제가 이 이야기를 꺼내면 재밌어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뛰는 첫 풀코스에서도 담당 페이스메이커를 해준다고 하네요. 다시 그때의 공포가 떠오릅니다… 훈련을 열심히 해야겠어요.
이 달리기는 욕심을 내면 바로 응징해 버립니다. 마치 “너 지금 욕심낸 거야? 오늘 달리기는 끝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제가 뛰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제 몸을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달리기에서 제 몸을 통제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중인 것 같아요. 그리고 욕심을 내지 않기 위해 참는 법도 배우고 있습니다. 달리기는 정말 인내의 스포츠이고 또 겸손의 스포츠인 것 같습니다.
거의 모든 경주에서 결국 한 번은 길을 잃게 된다. 눈을 뜨고 보니 곤경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심박수가 급격히 올라가고, 자신감이 무너진다. 불현듯 내면은 기준점을 잃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다, 자신을 출발선에 세운 자기 자신과 에고를 향한 익숙한 증오에 잠식된다. 속도를 늦추며, 자신을 책망하게 된다. 142p
저는 이 달리기에서 느껴지는 무력감을 극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 또한 욕심이겠지만 점점 페이스를 올리고 뛸 수 있는 거리를 늘리고 있습니다. 예전의 페이스에서 느꼈던 무력감을 뛰어넘는 경험을 하고 싶어요. 뛰어넘는다고 해도 또 다음을 뛰어넘기 위한 무력감은 계속되겠지만요. 그래도 7분대 페이스가 힘들어서 헐떡이던 제가 6분대까지 제 몸을 조절할 수 있는 정도까지 올라왔습니다. 그다음은… 아직 한참 남았네요. 페이스를 올리면 올릴수록 점점 그 무력감은 빨리, 크게 찾아옵니다. 그런데도 이 고통을 즐기는 러너들, 어쩌면 무서운 사람들 일지도 모르겠습니다.(저도 포함이긴 하지만요.)
*사진은 제가 첫 하프를 뛴 '서울 레이스' 메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