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경기에서 제일 중요한 주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페이스메이커는 목표의 기록을 달성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속도로 뛰어주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바람막이가 되어주기도 하죠. 제가 저번 주에도 이야기했지만 일정한 속도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한순간만 방심해도 느려지거나 빨라져요. 페이스가 10초 차이만 나도 굉장히 많이 나는 것이기 때문에(10초 차이만으로도 숨이 차요.) 특히 장거리에서는 이 속도 조절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페이스메이커를 따라가면 속도를 신경 쓰며 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아주 편해집니다. 그리고 급수대 지점, 코스, 오르막, 장애물 등을 맨 앞에서 신경 써서 알려주시기 때문에 심적으로 안정감이 들기도 합니다. 또한 페이스메이커 주위로 마치 양 떼처럼(?) 몰려서 같이 뛰기 때문에 약간의 연대감도 있어요.
어쨌든 그래서 페이스메이커가 잘 뛰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약속한 페이스에서 조금만 빨리 뛰어도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이 지쳐서 안되고 느려져서 약속된 시간에 들어오지 못하면 안 됩니다.(대회를 이끄는 리더라고 하면 쉬울까요.) 이 역할은 생각보다 훨씬 막중한 책임감을 가져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마라톤을 처음 뛰거나, 기록을 세우려는 사람들이 혼자 뛴다면 대회 공식 페이스메이커 밖에 믿을 사람이 없거든요. 그래서 그분들이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페이스메이커는 그 페이스를 아주 편안하게 뛸 수 있어야 할 수 있거든요. 얼마큼 많이 뛰셨을까요. 정말 상상도 안 가요.
제가 대학교 때 러닝동아리(수원대학교 러닝동아리 Running S)를 들어갔었는데요. 제가 재학 중일 때 정말 좋은 페이스메이커들이 있었습니다. 페이스메이커를 자처하는 친구들은 서브 4를 하거나 하프를 힘들게 뛰지 않는 친구들입니다. 초대 회장님은 10km, 21km 그리고 풀마라톤까지 크고 작은 대회에서 많은 친구들의 페이스메이커가 되어주었습니다.(저번주에 말했던 그 얄밉다던 친구입니다.) 그리고 작년 회장님을 통해서 절대 뛸 수 없을 것 같았던 5분 24초 페이스로 5km PB(이 최고 기록이 아직까지 깨지지 않았습니다.)를 세웠습니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저는 아마 이렇게까지 빠르게 성장할 수 없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친구들에게 항상 고맙습니다. 제 친구들은 똑같이 몇만 원의 돈을 내고 나가는 마라톤 대회에서 자신의 기록을 포기하고 오로지 저와 제 친구들의 기록을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뛰어줍니다. 훈련할 때도 제 페이스가 그 친구들한테는 굉장히 느릴 텐데 항상 맞춰줬어요. 지금 다시 쭉 생각해 보니 정말 감동이네요. 정말 착하고 정이 많은, 다정한 사람들입니다. 항상 같이 뛰어줘서 고마워 친구들아.
대회에서 공식 페이스메이커로 인해 페이스가 무너진 적도 있습니다. 2025년 서울레이스 하프코스에서 분명 6분 20초로 달려야 하는데 초반 10km를 6분 10초로 달렸습니다. (제 기준에서는 그때당시 6분 20초도 21km를 달리기에는 벅찼습니다.) 그렇게 오버페이스를 하게 된 저는 15km도 안되어서 퍼지게 되었죠. 처음 하프를 뛰었을 때보다도 기록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작년보다 훈련양이 훨씬 적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저는 페이스메이커를 탓하고 싶었어요. 초반 10km를 6분 20초로 뛰었다면 그때 최고기록을 세울 수 있었을까요?
+이때 재밌었던 일화를 하나 풀자면 저랑 같이 뛰는 친구가 있었는데요. 저희가 1km마다 동영상을 찍었습니다. 멘트는 꼭 “하나, 둘, 셋 0km~~~”를 크게 외치는 거였어요. 그럴 때마다 페이스메이커 분들과 같이 뛰시는 분들이 웃으시더라고요. 저희보고 이쁘게 뛴다고 해주셨습니다. 페이스메이커님은 “무슨 알람소리 같네 시계가 필요 없어~허허"라고 말씀해주시기도 하고 거리보다 일찍 영상을 찍으면 “아 아직 8km 안 됐어 내가 정확하게 찍으라고 알려줄게"라고 하시면서 다들 저와 제 친구를 좋아해 주셨습니다. 같이 외쳐주시기도 했어요. 그리고 저희들의 이름도 불러주시면서 응원해 주셨죠. “노수연 파이팅!!!” 이렇게요. (당시 페이스메이커가 두 분이셨는데 이 글을 보고 댓글 달아주시면 좋겠네요…) 그런데 제가 지처감에따라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페이스메이커분들이 눈치를 채셨습니다. 13km쯤이었나 “이제 힘들어? 목소리가 작아졌네.”라고 하셨고 15km에서는 완전히 페이스메이커를 놓치게 되자 저 앞에서 “어? 얘네 어디 갔어??” 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렇게까지 저희를 응원해 주셨는데 끝까지 못 따라가서 죄송해요…그리고 탓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열심히 훈련을 했어야 했는데. 어쨌든 같이 뛰었던 15km까지는 정말 즐겁게 뛰었습니다. 응원해 주셔서 감사해요. 언젠가 대회에서 다시 꼭 만나기를 기약하며,,
2025년 서울레이스 이후 낙담한 저는 열심히 훈련을 했고 코스가 좋은 시즌마감 마라톤을 12월에 나가게 됩니다. 언덕이 있는 3km 코스(광교호수공원)를 7번 달리기도 했죠. 꼭 이 마라톤 때 PB를 세우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훈련한 저는 6분 20초 페이스가 힘겹지 않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심은 금물! 저는 대회 페이스를 6분 20초 이상으로 올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때는 ‘서울레이스에서 같이 뛰었던 친구’ 그리고 ‘러닝 약속이 아니면 만나지 않는 친구’ 이렇게 셋이 함께 뛰었어요. 이 셋의 조합은 남들이 보면 조금 시끄러운 조합입니다. 좋게 말하면 에너지 넘치는 팀이죠. 이렇게 셋이 뛸 때면 항상 노래를 부르면서 뜁니다.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그냥 부르는 거죠. 텐션이 장난 아닙니다. 시즌마감 마라톤 때도 같이 뛰기로 약속하고 셋이서만 뛰려고 했는데 눈앞에 제가 목표했던 시간대에 페이스메이커가 보였습니다. 잘 찾아보지 않은 제 잘못이기도 하지만 페이스메이커가 또 오버페이스 할까 봐 두려워서 원래 안 따라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제 친구들이 “그냥 따라가자~”라고 하는 바람에 ‘그래~ 이번에는 연습 많이 했으니까 페이스가 조금 빨라지더라도 괜찮겠지 뭐~’라고 생각하고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민폐인 것 같아서 다음부터는 자제하도록 하겠습니다.) 또 페이스메이커분들을 웃겨드렸죠. 그리고 페이스메이커님과 이런저런 대화도 했습니다. 제가 이번에 PB를 노리고 뛰는 거라고 하니까 “그러면 에너지를 좀 아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노래 불러도 괜찮아요?”라고 하셨지만 여전히 저와 제 친구들은 보란 듯이 더 크게 후렴을 부르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페이스메이커분은 웃으셨는데 괜스레 제가 더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그 옆에 같이 뛰시던 분들은 거의 죽상이셨는데 저희 셋만 거의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그리고 반환을 해서 *마의 17km를 지나도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느려서 조금 답답했어요. 페이스메이커님이 저에게 “오~ 여유 있으시네요~” 하셨고 저는 “훈련 진짜 열심히 했거든요!!!”라며 뿌듯해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2km 남았을 때부터 속도를 올리라고 하셨지만 조금 지루했던 저는 그 말을 안 듣고 18km 지점부터 조금 빨리 뛰어서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앞서갈 때 기분 좋게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면서 갔던 게 기억이 나요. 그리고 대회 끝나고 다시 만나서 사진도 찍었습니다. 저희보고 덕분에 너무 재밌게 뛰었다고 말해주셨어요. 그때 참 기분 좋았는데. 혼자 심심할 때는 페이스메이커와 떠들면서 가도 좋을 것 같아요. 엄청 빠른 페이스가 아니라면 말이죠. 그분들은 고인 물이라서 아마 조금 느린 페이스는 지루해하실 겁니다. 제가 본 대부분의 페이스메이커님들은 대화하는 걸 좋아하시더라고요! 언젠가 여유 있을 때 같이 뛰어보세요.
*10km에서는 7~8km가 마의 구간이고 하프에서는 17~18km가 마의 구간입니다. 이 구간만 들어서면 힘들어져요. 뛰시는 분들 아시죠?ㅠㅠ
‘페이스메이커’ 그리고 ‘레이스 패트롤'을 맡으신 분들은 풍선을 달고 다니십니다. 페이스메이커는 풍선에 페이스와 시간이 적혀있고 레이스 패트롤은 적십자가 그려져 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왜 하냐고요? 페이스메이커와 함께 뛰면 또 재밌는 점이 바로 이 ‘풍선’입니다. 뛰게 되면 이 풍선이 뒤로 누울 수밖에 없는데 자꾸 머리에 콩! 하고 부딪히거든요. 제 친구는 그 풍선에 맞아보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뛰다가 자꾸 머리에 부딪히면 좀 웃겨요. 이것도 마라톤의 재미 중 하나인 것 같아요. 마음 같아서는 풍선을 손으로 처보고 싶은데 그러면 페이스메이커님께 피해가 가기에 못해서 아쉬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가끔 대회 공식 페이스메이커 풍선이 아닌 다른 풍선을 가지고 뛰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분들은 비공식 페이스메이커입니다. 저도 잘 모르는데 아마 크루 같은 곳에서 해주시는 게 아닐까요? 어쨌든 출발 대기 선에 하늘을 보면 풍선들이 둥실둥실 떠 있는 게 대회장 풍경입니다. 이제는 풍선이 없으면 뭔가 조금 서운해요(?)
달리기 인류에서는 선수들이 돌아가며 페이스메이커를 맡는 훈련이 나옵니다. 말도 안 되게 빠른 이 선수들의 페이스메이커는 누가 하나 싶었는데 선수들끼리 돌아가면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책의 이 부분을 다 옮기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아쉽네요.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배우는 것이 정말 인상 깊었어요. 서로의 발을 맞춰서 그 사람이 달리는 스타일을 흡수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하지만 에티오피아 선수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한 몸처럼 서로 호흡이 완벽했다. 함께 수없이 많은 훈련을 거듭한 결과, 똑같이 효율적이고 절제된 보폭으로 달리고 있었다. 96p -달리기 인류-
따라서 아디스의 선수들은 종종 선두를 맡거나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하는 걸 두고 ‘동료의 부담을 대신 짊어지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선수들은 서로 에너지를 나누며 함께 발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98p -달리기 인류-
‘페이스메이커'라는 부담을 가지고 대회에 출전하신 모든 러너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기록을 세우고 끝까지 대회를 마칠 수 있습니다. 달리기를 얼마만큼 사랑하면 페이스메이커까지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얼마나 많이 뛰고, 연습하셨을까요. 이 글이 그 수고에 조금이나마 보답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까 탓한 건 그냥 제 역량 부족입니다. 귀여운 투정으로 받아주세요. 꾸벅) '페이스메이커'가 굉장히 무거운 자리라는 것을, 수많은 달리기로 인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도 쭉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감히 페이스메이커를 할 자격은 안되지만 첫 하프를 뛰는 친구를 도와주고 싶어서 해주겠다고 말해버렸습니다. 이제 1달 반 정도 남았는데요. 그 친구에게 폐가 되지 않게 연습을 많이 해야겠습니다. 천천히 뛴다고 해도 대회에서 누군가를 이끄는 것은 처음이라 조금 떨리네요.
다음 글은 이어서 ‘같이 뛰는 것'에 대해서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