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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준 May 27. 2020

#19. 가을의 전설이 되다

에세이‘사막을 달리는 간호사’

사막 마라톤을 위한 오프를 약속 받은 다음 날 수간호사 선생님이 나에게 한 가지 질문을 했다.


“그런데 너 마라톤 해 본 적 있니?”


갑자기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제야 생각해 보니 살면서 단 한 번도 마라톤을 해 본 경험이 없었다. 나는 말 그대로 마라톤에 ‘마’ 자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사막 마라톤을 위한 휴가를 받는 것에만 집중해 왔다. 정작 내가 250km의 기나긴 사막마라톤 구간을 완주할 체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수간호사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했다.


“해 본 적은 없지만 열심히 준비하면 완주할 수 있습니다.”


대답은 자신 있게 내뱉었지만 조금씩 걱정되기 시작했다. 기억을 더듬어 내가 마지막으로 제대로 뛰어 본 게 언제였는지를 생각해 봤다.5년 전 군생활의 마지막 날, 전역하기 전 군가를 부르며 연병장을 뛰었던 게 내가 달렸던 마지막 기억이었다. 생각해 보니 조금은 충격적이었다. ‘250m도 아닌 250km를 과연 끝까지 완주할 수 있을까?’ 사실 250km라는 거리는 나에게도 전혀 감이 오지 않는 거리였다. 조금 이해하기 쉽게 생각해 보면 서울에서 강원도 강릉까지 충분히 가고도 남는 거리였다. 갑자기 내가 저지른 일들에 대한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휴가라는 산을 하나 넘으니 체력이라는 또 다른 커다란 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하라 사막 마라톤에 나간다고 주변에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돌아오는 대답은, “진짜 체력이 좋은가 보네. 그러면 마라톤 풀코스도 뛰어 봤어?”였다. 물론 그 질문에 나는 자신 있게 답변할 수 없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살아생전 마라톤이라는 것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멍하니 넋 놓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가장 먼저 내가 생각한 것은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던가. 우선 250km의 마라톤을 대비해 마라톤 풀코스(42.195km)라는 작은 목표를 설정하고 준비하기로 했다. 당장 인터넷을 켜고 가장 가까운 시일에 열리는 마라톤 풀코스 대회를 검색했다. 앞으로 한 달 후에 개최되는 춘천국제마라톤 대회의 풀코스가 눈에 띄었고 나는 가을의 전설이라고 불리는 춘천국제마라톤에 참가 등록을 했다.


체력은 책상에 앉아 걱정하고 고민만 해서는 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었다. 마라톤 풀코스를 목표로 설정한 당일, 나는 바로 신발장 구석에 박아 둔 운동화를 꺼내 신고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여 맸다. 그리고 병원 앞 한강을 달리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병원 일에 치여 온몸이 피곤했지만 한강을 달리며 느껴지는 선선한 바람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오랜만에 몸을 움직여서 그런지 금방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심박동수가 점점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하염없이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광활한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에 도착할 것만 같았다. 눈을 감고 사하라 사막을 달리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심장이 빨리 뛰는 이유는 오랜만에 달려서만은 아니었다. 직접 몸을 움직여 달리다 보니 신기하게 머리로만 걱정할 때 느껴지던 불안감들이 조금씩 사라졌다. 비록 지금의 이 한 걸음은 미약하겠지만 끝은 창대하리라.


병원 근처 한강을 달리며 바라 본 풍경


그날부터 나는 근무 전, 후 그리고 쉬는 날에도 틈틈이 한강을 달렸다. 중환자실에서 3교대로 일하며 꾸준하게 운동을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상근으로 출퇴근을 하며 일정한 시간에 운동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힘들게 느껴졌다. 규칙 속에서 규칙을 만드는 것은 쉽지만 불규칙 속에서 규칙을 만드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3교대보다 규칙적인 생활이 가능한 야간 근무 전담 간호사를 신청했다. 밤에 일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지만 3교대보다 휴일도 많아 여러 가지 면에서 장점이 많았다. 야간 근무 전담은 사막마라톤을 위해서는 나에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렇게 나는 낮에는 달리고 밤에는 일하는 생활을 계속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직장 일을 하며 새로운 무엇인가를 병행해 나간다는 것은 커다란 노력을 필요로 했다. 특히 그것이 몸을 움직이는 운동이라면 더욱더 그랬다. 하지만 나에게는 사막 마라톤이라는 꿈이 있었기에 나약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아무리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들어도 사막을 달리는 내 모습을 상상하면 또다시 달릴 힘이 솟아났다. 꿈이란 그 자체만으로도 삶에 커다란 활력소가 되는 것이었다. 꿈을 위한 도전을 해 보기 전까지 나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었다.


춘천국제마라톤 대회 날이 하루 전으로 다가왔다. 매일같이 한강을 달렸다지만 풀코스를 위해 준비한 기간은 채 한 달이 되지 않았다. 평소 마라톤을 전혀 하지 않았던 나에게는 너무나 부족한 연습량이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일단 부딪쳐 보기로 했다. ‘뛸 수 없다면 걸어서라도 완주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풀코스는 아침 일찍 대회가 시작하기 때문에 대회 전날 밤 춘천에 도착해 개최지 근처 숙소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대회 전날 나이트 근무를 마치고 짐을 챙겨 춘천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숙소에 도착해 내일 대회를 위한 물품들과 옷가지를 머리맡에 놓아두고 몸을 뉘었다. 잠들기 전 설렘과 두려움, 걱정 등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치 처음 병원에 합격하고 중환자실로 발령 받았던 첫 출근 전날 밤과 비슷한 기분이었다.눈을 감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그래, 할 수 있다 믿으면 할 수 있다....’


대망의 풀코스 대회 날이 밝았다. 아침에 일어나 로비에 나와 보니 전국 각지에서 이번 마라톤을 위해 모여든 많은 참가자들로 로비가 북새통을 이뤘다. 숙소에서 대회장까지는 차로 이동해야 할 만큼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로비에서 대회 복장을 하고 혼자 아침을 먹던 나를 눈여겨 본 아저씨 한 분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풀코스 나가시나 봐요?”


몇 마디 대화를 나눠 보니 아저씨는 직장을 다니며 주말마다 마라톤을 취미로 즐기신다고 했다. 아직 대회장까지 가는 차편을 구하지 못했다고 말하니 꼭두새벽부터 내가 혼자 대회장으로 이동할 것이 안쓰러워 보이셨는지 나를 흔쾌히 대회장까지 태워주겠다고 했다. 친절하고 정이 넘치는 아저씨를 만난 덕분에 편하게 대회장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아저씨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마라톤은 보통 30대에서 50대가 주 연령층인데 얼핏 보기에도 어려 보이는 내가 마라톤에, 그것도 풀코스에 참가한다고 하니 많은 관심을 보이셨다. 사실 마라톤 대회는 처음 참가하는 것이고 풀코스 또한 이번이처음라고 말하니 운전을 하다 말고 나를 보는 눈이 휘둥그레지셨다. 춘천국제마라톤 풀코스는 경사 구간이 많아 마라톤 초보가 도전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코스라고 했다. 더군다나 마라톤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더욱이 힘들 수 있다고. 갑작스러운 내 고백에 아저씨의 눈빛이 걱

정으로 가득해지셨다. 처음 풀코스를 참가하면 굉장히 힘들고 아마 완주를 못하고 중도에 포기를 할 수도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마라톤 중간에 혹시나 몸에 이상이 있거나 너무 힘들면 무리해서 달리지 말고 포기하라는 조언도 주셨다. 마지막으로 걱정이 되셨는지 여러 가지 마라톤 팁을 알려 주셨고 대회장에 도착 후 감사의 인사를 나누고 아저씨와는 헤어졌다. 나는 이상하게도 아저씨의 조언을 듣고 걱정이 앞서기보다는 내가 넘어야 할 커다란 산이 앞에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마 전날 밤 근무로 잠이 많이 부족해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가을의 전설, 춘천 국제 마라톤 대회


풀코스 참가자들의 출발을 알리는 총포가 울려 퍼졌다. 42.195km의 대장정이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내 인생 첫 마라톤 대회의 첫발을 내딛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춘천의 청명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달리는 것은 굉장히 상쾌했다.달리면서 눈 앞에 펼쳐지는 춘천의 가을 풍경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가볍게 느껴졌다. 이대로 쭉 쉬지 않고 42.195km를 달려 금방이라도 골인 지점까지 완주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는정말 그랬다. 20km 지점을 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풀코스의 절반 지점을 통과했을 때부터 1초에 100번씩 달리는 것을 멈추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깃털처럼 가벼웠던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지더니 한 걸음을 내딛기 힘들 정도로 무거워졌다. 누군가 내 다리를 잡아당기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지금 멈춰도 괜찮아.’ 마음속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발걸음을 멈춰 그 자리에 대자로 드러누워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출발 직전 스스로와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비록 걷게 되더라도 절대 발걸음을 멈추지 말자고. 30km 지점부터는 이미 체력적으로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음은 우사인볼트처럼 달리고 싶었지만 현실은 걷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조금 빠르게 걷고 있었다. 하지만 결코 멈추지는 않았다.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40km 지점부터는 정말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야 했다. 이제 정말 결승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금방 나타날 것 같았던 골인 지점이 보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누군가 2km 남짓 되는 거리를 길게 늘려 놓은 것만 같았다.


드디어! 저 멀리서부터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골인 지점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초인적인 힘을 쥐어짜 내어 달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많은 사람들의 환호성과 축하를 받으며 결승선을 통과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결국 풀코스를 완주해 낸 것이다. 그리고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 그 순간 나에게 기록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나에게는 큰 의미였다. 마라톤에 ‘마’ 자도 모르던 내가 풀코스를 완주해 냈다. 그것은 나에게 커다란 희망과 자신감을 안겨 주었다. 250km의 사막 마라톤도 이제 더 이상 나에게는 불가능한 꿈이 아니었다.


마라톤에 '마'자도 모르던 내가 가을의 전설이 되었다.
에세이‘사막을 달리는 간호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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