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글로 Jul 25. 2024

어째서 나는 화를 내는 엄마일까

그랬구나. 네가 힘들었겠다.

반성문



여름방학을 맞이한 딸이 아침 8시 친구와 함께 운동을 한다고 계획을 잡았다.

앞에 작은 동산 둘레길을 친구와 함께 뛰기로 했단다.


오늘 아침 모자를 이리저리 쓰며 거울을 보고 있길래 말했다.


"슈미나. 여름인데 얼마나 덥겠니.  그냥 지하 피트니스센터에서 러닝머신을 타지 그래?"

"그럼 엄마가 출입구 지문 눌러 주실 거예요?"

"그래~"

(우리 아파트 피트니스센터는 아이 지문 등록을 해주지 않는다 - 문제의 발단)


마침 남편이 출장이라 조금 늦게 나간다기에 대신 피트니스센터 문을 열어 달라고 했다.

아빠: "응~근데 나도 씻고 나가야 하니까 친구 연락되면 씻기 전까지 말해줘~"

부랴부랴 딸이 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카톡을 한다.

아무래도 친구가 일어나지 않은 것 같다.

"친구가 아직 자나 봐요."


"그래? 그럼 엄마가 출근하면서 8시 20분 전에 열어줄게~"

"안 돼요. 그럼 저 시간이 안 맞아요!"

"방학인데 무슨 시간이 안 맞아?"

"30분 동안 계획이 틀어져요"


같이 가는 친구가 일어나지도 않았고 20분이 늦어지는 것뿐인데 저렇게 말하니 이해가 안 됐다. 부탁하는  처지에 왜 저러는 건가 싶었다. 아빠가 열어준다고 했으니 나는 씻으러 들어갔다.


잠시 후 아빠가 씻고 있으니 나한테 8시 20분에 문을 열어 주라고 한다. (남편은 왜 그새 깜빡했을까)


시간이 안 맞아서 안 된다더니 뭐지 싶었다. 심지어 친구는 아직도 연락이 안 된다고 했다.

"너의 계획에 엄마를 맞추려고 하지 말고 부탁할 땐 부탁 들어주는 사람 스케줄을 맞춰야 해. 엄마랑 아빠도 출근하잖아."

"네"

"운동화 더러우면 민폐니까 바닥 깨끗하게 지금 준비해 놔~"

"네."

부랴부랴 정리하고 나가는데 갑자기 내 운동화를 신으려고 했다.

나는 발이 220mm, 딸은 발이 240mm다.

잘못 봤겠거니 하고 물었다.

"그거 엄마 운동화야"

"알아요"

"그거 220mm이야"

"그럼 안돼요?"

자기 운동화는 더럽다며 내 운동화를 신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정지 버튼이 눌러지지 않았다.

화가 났다.

꾹꾹 참았지만 내 입에선 잔소리가 튀어나왔고 그 잔소리와 함께 피트니스센터로 갈 수밖에 없었다.


도착하여 빈 피트니스 센터를 본 순간 나는 갑자기 아이에게 미안해졌다.

스스로 운동하려는 기특한 딸을 왜 나는 따뜻한 마음으로 이해해주지 못할까.

약속을 지키지 않은 친구보다 더 대견한 우리 딸을 왜 이해하지 못할까.

운동하는 어른도 하나 없는 그곳에서 혼자 운동을 하겠다는 딸을 왜 혼내고 말았을까.

밖에서 뛴다는 아이를 피트니스센터로 가서 뛰라고 했던 사람은 나인데 말이다.


"혼자 위험하니까 끝나고 갈 때 카톡해 엄마 걱정되니까"

자책과, 반성, 화를 끌어안고 운전대를 잡고 출근을 했다.




요즘 며칠 반복적으로 딸에게 화를 내고 있다.

화를 냈다가도 잠시 시간이 지나면 내가 늘 미안하다고 말하게 되기 때문에 문제는 나한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에겐 별일이 아닌 일상적인 모습에 어째서 나는 아이를 기다리지 못하고 화를 내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며칠 전 유튜브에 하버드출신 소아정신과 의사의 말을 들었다. 아이의 말에 공감하고 행동은 제한하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동안 반대로 하고 있었다. 역시 내가 문제다.


공감의 말: " 그랬구나. 네가 많이 힘들었겠구나"  


그날 저녁 식사 도중에 나는 그대로 실습했다.

"그랬구나. 슈미니가 많이 힘들었겠구나~"

"엄마 왜 그래요. 그거 도덕책에 나오는 말이 잖아요. 으흑 하지 말아요."

하루 만에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는 것을 깨우치고 말았다.


딸은 아가 때부터 내 품에 잘 안겨있지 않았다.

앉아 있을 수 있는 그때부터 딸은 내가 안아주면 빨리 내려달라고 몸을 비틀었다. 딸이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재빨리 일어나 안으면 내려줄 때까지 몸을 비틀어댔다. 내려주면 바로 또다시 베란다로 돌진해 나갔다.


자연스레 딸은 내 품에 안겨있는 시간이 줄었다. 나는 안아주고 싶었으나 딸은 내 품보단 자기 마음대로 만져보고 살피는 것에 집중하는 아이였다.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보이는 성향대로 크는 것일까?

8개월 무렵부터 보이던 그 성향을 16살이 된 지금까지도 보여주고 있다. 엄마가 느끼는 강도로 말하자면 더 세졌다.


좋게 말하면 자기 주도적인 삶이고 나쁘게 말하면 타인의 감정을 잘 읽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늘 나는 염려스러웠다. 어렸을 때부터도 뭐든지 잘해야 직성이 풀리고 배우고 싶은 것, 듣고 싶은 수업은 무조건 들어야 했다.


시간적으로 맞지 않거나 체력적으로 힘들 것 같은 일들은 말려도 보았었다. 그러나 꼭 하고 싶은 것들은 울어서든 고집을 부려서든 무조건 하고 말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친구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을 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하면 어쩌지? 그러다 혼자 지내게 되면 어쩌지? 타인에게 배려도 없이 고집만 부리면 어쩌지?


나도 여자이기에 여자들의 성향과 그룹형성의 과정을 다 겪어왔기에 여자들의 세계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친구들과 하나로 잘 덩어리 져 지내져 가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6학년 무렵 사춘기가 왔고 외향적이고 밝고 명랑하던 성격이 내성적이고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생각이 많아졌다. 그동안 내가 너무 많은 것에 제한을 했었나? 아이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했어야 했었는데 그러지 못했나? 어째서 저렇게 차분해졌지?


엉뚱하고 잘 부딪치고 그리고 씩씩하던 딸이 늘 걱정이던 내가 얌전해지고 조용해지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참 알 수 없는 엄마 마음이다. 사춘기가 끝나고 딸은 다시 수다를 때도 있고, 침착걸이 되기도 하고 엉뚱해지고 넘어지는 딸로 돌아왔다.


그랬으면 되었다.

딸은 자기 주도적인 아이다.

공부에서든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든 모든 것이 자기 주도적으로 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다.

엄마는 그저

"그랬구나~"

"그렇구나~"라고 하면 되는 일이다.

오늘도 문제는 엄마였다.


내일은 반성문 써야 하는 마음이 안 들었으면 좋겠다.

요 며칠은 정말 딸을 기숙사 있는 고등학교를 보내야 하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잠시 후 카톡이 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