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무물 | 32번째 이야기
10년 만에 마라톤 대회를 나갑니다! 미티님과 끼리님과 함께!! 후후훗! 10년 만에 대회라면 거창하지만, 실은 생애 두 번째 마라톤이에요. 저의 첫 마라톤은 트렌드 세터가 되고 싶었기에 나이키 마라톤을 신청했죠. (10년 전에는 힙스터가 아니라 트렌드 세터라고 했답니다.) 당시 힙한 건 다하고 다니는 언니들 따라서요. 저는 트렌드 팔로워였지요. 트팔.
아무런 준비 없이 참가했고 다음날 골반이 빠지는 듯한 근육통을 맛보았습니다. 그래도 좋았어요. "나이키 마라톤 완주했거든요."라고 말할 수 있었으니까요.
몇 년 뒤, 아디다스 마라톤을 신청했습니다. 퇴사 기념으로 룰루랄라 신나게 달릴 작정이었죠. 안타깝게도 티셔츠도 가방도 다 받았는데 못 나갔습니다. 당시 그만둔 회사는 야근이 일상이었습니다. 업무 강도와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뒀는데요. 퇴사하고 며칠 뒤, 왕왕 걸리던 방광염이 심해져 병원에 갔더니 신우신염이라고 했습니다. 낼모레 마라톤을 나갈 수 있냐는 물음에 의사 선생님을 펄쩍 뛰셨어요. 아직 젊어서 모르겠지만, 내장이 한 번 망가지면 회복하기 힘들다고요.
그 아쉬움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았습니다. 그래서 세월이 흘러 흘러 빵빵런을 신청한 겁니다. 지금은 다행히 특별히 아픈 곳이 없어 참가할 수 있어요! 달리기를 막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마라톤 대회는 참여한 이유가 있어요.
첫째, 이사 등등 바쁨을 핑계로 운동을 좀 쉬었어요. 달리기를 시작으로 운동을 다시 시작하려고 해요. 연약한 의지 대신 돈 들인 데드라인을 믿기로 했죠. 마라톤 완주라는 목표가 있으면 연습이라도 할 테니까요. 둘째, 대회에 나가면 봄과 여름 사이의 아침 공기를 만끽하겠죠? 또한, 운집한 젊은 이들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테고요. 맞습니다. 산에 정기받으러 가듯 빵 좋아하는 MZ들의 달뜬 분위기를 느껴 보려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제는 호기심이 생기는 일은 웬만하면 도전하려고 해요. 경험이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가만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잖아요. 실패마저도요. 물론 완주 리워드로 주는 빵이랑 메달도 탐납니다.
미티님이 마라톤 대회에 나가는 이유는 뭔가요? 그리고 나가고 싶은 꿈의 대회가 있는지 궁금해요.
10년 만에 마라톤이라니! 긴장되지 않으시나요?
중학교 때부터 대학교 졸업 때까지 육상 경기에 임하며 언제나 경기장은 설레고 두려워요. 내가 해야 하는 몫과 나의 노력을 단 몇 초만에 보여줘야 하는 곳이니까요.
아직도 마라톤 대회에 나가서 맡는 파스 냄새에 심장이 두근두근 뛴답니다.
10년 전 나이키 마라톤이라..나이키 우먼스 마라톤이었을까요? 그렇다면 아마 저흰 10년 전에 이미 만난 사람들이겠어요. 저도 그 마라톤을 참여했었거든요!
아마 키티언니와 비슷한 이유로 시작했을 거예요. '나이키에서 하는 마라톤이라니! 그 자체가 너무 멋지다!'
단거리 선수였던 제가 마라톤을 나가게 된 이유는 '일'이었어요. 육상선수 시절에는 제 몫만 잘 해내면 되었었는데 회사 일이라는 게 그렇지 않더라고요. 하루 종일 열심히 해도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날도 있었고, 나 혼자 하는 일보다 팀이 함께 하는 일이 더 많았죠. 너무 답답했어요. 8시간 이상 뭔가를 열심히 했는데 저에게 돌아오는 건 허무함 뿐이라니.
그래서 달리기를 시작했어요. 시작했으면 눈앞에 보이는 성취를 얻고 싶어서. 일이 끝나고 9시에 신용산역에서 녹사평역을 지나 이촌역, 그리고 다시 신용산까지 달렸어요. '오늘은 한 번도 쉬지 말자', '오늘은 5분 40초 페이스를 유지하자'. 스스로와 약속을 하고요. 그리고 최선을 다해 그 약속을 지켰어요. 그 결과로는 저에게 엄청난 성취를 주었죠.
나는 나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구나, 나는 오늘 뭔가를 해내고야 말았구나.
이 작은 성취가 저에게 자신감을 주고, 그 자신감은 일에도 자연스럽게 녹아지더라고요.
저에게 달리기는 명상이에요. 반복되는 리듬과 거친 호흡 속에서 과거와 미래, 현재를 계속해서 생각해요. '아, 그때 나는 이렇게 말할걸', '이건 내가 잘못한 게 맞네', '나중에 나는 이런 일을 하고야 말겠어'. 많은 생각을 머릿속에 넣고 다니다 금방 당장의 호흡과 발걸음을 옮기는데 집중을 해요. 빠르게 몰입하고, 빠르게 집중하죠. 그래서 전 달리기가 좋아요.
나와의 싸움, 기록 경신의 목표보다 차분히 혼자 온전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달리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는데 몇몇 있더라고요.
무라카미 하루키와 나이키의 창업자 필 나이트.
최근 본 영화 '에어'에서 필 나이트는 중요한 결정이 필요한 순간에 차분하게 자신의 결정을 들려줘요. 이런 결정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달리기를 했기 때문'이라면서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책에서는 이런 문장도 있죠.
'나는 달려가면서 그저 달리려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원칙적으로 공백 속을 달리고 있다. 거꾸로 말해 공백을 획득하기 위해 달리고 있다.'
너무 많은 결정과 자기반성에 있어 달리기는 그 공백을 만들어줘요. 충분히 생각하고 돌아보며 앞으로 나갈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요. 그래서 저는 달리기가 좋아요.
마라톤 대회를 나가는 이유는 느슨하게 즐기는 달리기를 벗어나 격렬하게 스스로의 한계에 부딪히는 경험을 하고 싶어서예요. 그럴 때는 무척 긴장도 많이 하죠. 하지만 이것보다 좋아하는 건 친한 친구들과 즐기며 달리는 거예요. 최선을 다해 골인지점까지 다가가 서로의 완주를 축하해 주는 건 너무 멋진 일이잖아요.
그래서 이번 마라톤도 무척 기대가 됩니다. 키티언니와 달리는 날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두근 거리며 그 시간을 기다릴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