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열정의 모양과 색깔이 변하더라도..
한때 나의 열정은 빛나는 불꽃같았다. 매 순간 폭죽처럼 터질 것 같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때로는 나의 타오르는 열정과 불꽃이 한순간의 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휘발유와 같은 연료를 필요로 해야 했다. 종종 내 주변의 누군가에게 작은 불똥이 튀기도 한다.
치타가 질주를 시작할 때, 그 첫 발은 마치 불꽃이 터지는 것처럼 강렬하다. 최고 시속 110km 전후라는 포유류 최고의 속도를 자랑한다. 모든 근육이 폭발적인 에너지를 내뿜으면서 사냥감을 향해 전속력으로 나아간다. 한 때 내가 취해있었던 열정은 바로 이 치타의 첫 발을 내딛는 것과 같은 에너지였다. 이 에너지의 연속이었다. 전력을 다해서 쏟아붓는다는 것을 지속하는 내 모습이 멋있었다.
결혼 전, 아침마다 나는 서둘러 하루를 준비하느라 속도감 있게 분주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출근 준비며, 옷차림이며, 가방에 노트북과 화장품 등의 다양한 아이템을 바리바리 싸들고 매직기로 머리를 쫙쫙 펴는 순간까지, 머릿속에는 할 일이 끝없이 떠올랐다. 마음이 늘 분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두르면서 움직이는 나를 보며 아빠가 말했다. " 천천히 해라. 천천히. 차분히 해야 더 효율적이야. 맨날 서두르지 말고... " 그때까지만 해도 아빠의 말이 하나도 와닿지 않았다. '천천히 하라니, 마음이 이렇게 바쁜데 어떻게 차분히 하라는 말이지? 할 일이 산더미라 빨리 나가야 하고 준비할 것도 많은데...' 그저 천천히 하라는 아빠의 말은 나에게 하나도 설득력이 없었다. 마음이 바쁜 나에게 차분함이란 그저 사치였고, 나와 동 떨어진 이야기 같았다.
20대에 프리랜서로 지내던 어느 날, 한 클라이언트였던 사장님이 내게 말했다. "선혜 씨는 놀기도 잘 놀고 일도 잘하는 것 같아요. 그런 에너지가 어디서 나와요?"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순간 멈칫했다. 내 안에는 언제나 에너지가 넘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사장님은 내가 항상 바쁘게 움직이고, 무거운 맥북을 들고 다니면서 열정적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다. 칭찬일까? 아니면 한편으로는 안쓰럽고 걱정돼서 해주신 말일까? 비슷한 말을 또 다른 자리에서 들은 적이 있다. 어떤 모임의 여성분이 나에게 말했다. "선혜 씨는 뭐가 그렇게 항상 즐거워요?" 이 말이 내게는 비수로 다가오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별 말 아닌데, 어쩌면 누군가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가 내 인생의 큰 척도였던 것 같다. 나는 늘 누군가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를 지나치게 신경 쓰면서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심지어 나 자신에게 까지도.
몸으로 부딪히면서 알게 되는 삶의 지혜는 그 어떤 책 보다 큰 교훈을 준다. 사회생활 15년 차, 지난 15년간 수많은 경험을 지속하면서 단순히 치타의 첫 질주와 같은 열정은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체화하게 되었다. 치타의 껑충껑충 뛰는 그 날카롭고 우아한 곡선의 치타의 모습처럼 그것은 내 삶을 반짝반짝 빛나게 해주는 최고의 불꽃도구였다. 그렇게 나를 빛나게 해 주던 도구는 서서히 방향성을 잃어갔다.
"진짜 나의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어느 순간부터 내가 삶에서 진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속적으로 생각하고 성찰하는 습관을 들였다. 나의 최고의 성찰 도구는 <메모>였다. 디자인이 되어있지 않은 단순 무지노트에 끊임없이 끄적이며 나 자신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내가 추구하는 방향은 뭐지? 이 저자는 왜 이렇게 말하지? 나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지?' 제2의 사춘기가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온라인상에서 치타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가? 구글링을 해 보면 치타가 어딘가를 응시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5km 거리에서도 사냥감을 포착할 수 있고, 120도 시야각을 가진 예리한 시력을 지닌 치타가 어딘가를 응시할 때, 단순한 바라봄이 아니라 사냥감의 위치, 행동 패턴, 거리 등을 분석하는 순간이다. 치타의 응시하는 행위는 사냥의 중요한 첫 단계라고 한다. 아주 작은 움직임, 속도, 방향을 모두 계산해서 최적의 타이밍과 질주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다. 치타의 질주는 최고시속이 110km 전후이지만 200~300m를 달린 이후에는 속도가 뚜렷하게 떨어진다. 고작 10초 뛰면 피크라고 한다. 알고 보니 단순히 빠르고 강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에너지를 가장 필요한 '그 순간'에 몰입하면서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500미터쯤 됐을대는 완전히 한계에 도달해서 전력질주 이후에는 숨을 골라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진짜 목표물이 있을 때는 오히려 뒤로 조용히 다가가 천천히 움직이면서 목표물을 응시하며 포착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금방 지치지만 본인을 가장 잘 알고 전략적인 치타의 동물적인 '진짜' 모습처럼, 나의 열정도 서서히 은은한 색깔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진짜 열정은 '한 순간의 몰입'을 주도적으로 핸들링하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목표달성의 도구였다. 무조건적인 '강강강강'만 지속하며 지쳐 나가떨어지는 삶보다는 음악시간에 배웠던 '강약중간약' 4박자로 내 라이프스타일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지속가능한 패턴을 스스로 터득해 나가기 시작했다. 1년 단위의 큰 행사를 체계적으로 준비하며 큰 그림을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해체하여 체크리스트를 만들듯이 전략적으로 내 삶을 기획하고 지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꾸준히 탐구한다. 물론 지금까지도 탐구 중이다. 그에 따른 상세한 체크리스트를 만든다.
내가 생각하는 진짜 행복은 '보통의 날들'이다. 언제부턴가 '열정'이라는 단어가 지긋지긋해졌다. 열정이라는 단어보다는 '몰입'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할 것 같다. 몰입하는 시간을 하루에 몇 시간, 일주일에 며칠, 이렇게 정해놓고 지속가능한 삶을 살아야 더 편안한 보통의 날들을 즐길 수 있다. 일은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자극적인 삶을 추구하면서 나 자신을 탐구하는 것에는 극단적으로 소홀한 한국 사람들, 그리고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늘 어렵다고 하는 시대에 '어떻게 나이들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했으면 좋겠다.
인생에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 마침표가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