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직은 왜 새 조직에서 흔들리는가

by 루바토 노트


식물이 자라고 뿌리가 깊어지면 분갈이를 한다. 더 큰 화분으로 옮겨져 새로운 흙으로부터 양분을 얻는 과정에서 식물은 많은 성장통을 겪는데, 이때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식물은 시들어버린다. 지방에 본사를 둔 작은 잡지사에서 대기업으로 이직한 나도 일종의 분갈이 과정을 거쳤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이미 그려진 그림의 일부를 긁어내고 새로 덧칠하는 게 더 어렵고 까다롭다는 걸 왜 몰랐을까.


처음엔 그랬다. 내 경험은 충분히 통할 것이고, 이전 직장과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거라고. 하지만 그 믿음은 일주일을 채 넘기지 못했다. 이직한 회사의 일하기 방식은 몸에 맞지 않은 옷처럼 답답했고, 조직문화와 업무 프로세스는 낯설고 비효율적으로 느껴졌다.


전화 한 통이면 끝날 일을 왜 이리 많은 이를 줄줄이 참조에 걸어 메일로 소통해야 하지? 나 좋자고 쓰는 글도 아닌데 왜 이렇게 사정사정하며 필요한 자료들을 요청해야 하는 거야? 새로 배운 것들을 매일 머릿속에 욱여넣었지만, 납득이 가질 않으니 일을 제대로 한 게 맞는지조차 판단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짧은 수습 기간 내에 퍼포먼스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압박감은 원래도 넓지 않던 시야를 더욱 좁게 만들었다.


이렇게 낙오되는건가....

끝없는 늪으로 빨려 들어가던 나를 건져 올려준 건 노련한 선배들이었다. 조직 간 이해관계와 일의 진짜 구조를 파악하고, 매일 보고 듣고 깨달은 것을 어떻게 업무에 적용해 볼지 기록하는 과정을 통해 나는 서서히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알게 됐다. 나의 몰이해는 내가 속한 조직과 그 조직에서 나의 역할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생긴 오만함의 산물이었다는 걸. 경력직의 진짜 경쟁력은 기본기에 더해진 협업 능력과 피드백 수용력이라는 걸.


분갈이를 할 땐 진정으로 ‘다시 시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기존의 뿌리가 깊을수록 더더욱.

익숙한 것을 내려놓고, 다시금 배우고 받아들이는 자세야말로 새로운 성장의 시작이다.





editor 빈

언론사 기자와 사보 에디터로 6년간 일하며 살아있는 목소리가 담긴 콘텐츠를 만들어왔습니다. 서울을 탈출하고픈 30대 여성의 싱글라이프를 기록하며 일상 속 스쳐가는 생각과 감정들을 붙잡아두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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