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 저는 승진하고 아이를 낳고 싶어요.

아이를 낳기 몇 년 전, 회사 선배와 나누었던 이야기들

by 리오주인


결혼했던 해와 이직했던 해가 같았다.


첫 해는 이직을 통해 바뀐 업을 배워가면서 신혼을 즐겼다. 퇴근 후에는 PC방으로 가서 남편을 만나서 롤 한판을 하며 둘 만의 재미있는 시간들을 보냈다. 두 번째 해에는 일에 집중하면서 나란 사람이 늘 그렇듯 사무실에 있는 시간이 길었지만 주말에는 점심, 저녁을 PC방에서 먹으며 LOL을 즐겼던 한 해로 기억한다. 둘 만의 시간을 충분히 즐기면서 아이에 대한 생각이 둘 다 있긴 했지만 남편과 서로 아이를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나의 결심의 순간들을 기다렸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남편이 회사에서 특진을 하게 되었다.

남편은 특진으로 인하여 1년 빨리 과장 직급을 달게 되었고 그때부터 나의 모든 조급함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어느 날 회사 회식으로 술을 한 껏 마시고 아파트 단지 내 어느 입구 앞에서 누워서 남편을 불렀다. 남편은 어서 들어가자라고 나를 재촉했는데 나는 펑펑 울며


"너는 승진했잖아! 너는 인정받잖아. 나는 힘든데..."

라는 말만 되뇌며 남편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던 그날을 기억한다.


당시에 나는 초조했던 것 같다. 이직한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데 한 편으로는 능력 있는 나이 차이가 얼마 안나는 후배가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는 생각하지만 고과가 B에 멈추는 것이 S, A 고과만 받는 남편에 비하여 내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내가 아이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나의 커리어 욕심과 반비례하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대리 3년 차가 넘어가면서부터 적정 시점에 승진이 되지 않으면 나 하나만 늦어지는 게 아니라 조직 자체에 정체된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물론 그것은 진실과 사실이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라는 생각에 스스로 갇혔던 것 같다. 슬슬 양가에서도 아이는 언제 가질 것인지에 대하여 대놓고 물어보지는 못하셔도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게 느껴지는 중에 어느 날 또 방언이 터지듯 대구 출장을 다녀오는 기차 안에서 회사 친한 선배를 붙들고 아이 생각을 쏟아냈다.


"선배, 저는 승진하고 아이를 낳고 싶어요."

"어?"


지금 생각해 보면 선배는 많이 당황했을 것 같다. 난 선배보다 9살이나 어렸고 선배는 이미 유아기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아빠였고 나는 구체적인 임신 계획조차 없는 패기 만렙의 대리 나부랭이였으니까. 선배는 파트장으로 나의 준인사권자에 가까웠는데 난 그에게 거침없이 나의 생각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빨리 가지는 건 싫어요. 저는 꼭 과장 승진한 후에 그 해에 임신해서 아이를 가지고 싶어요."

"어..."

"남편이 올해 승진했는데 내심 기쁘지가 않더라고요. 제가 지는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승진이 저에게 꼭 필요해요."

"리오주인아, 근데 승진과 출산은 다른 거야."


선배는 내가 만나 본 남자 선배들 중 가장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었음에도 가정에도 충실한 사람이었다. 영업을 겸하고 있는 업이었기에 잦은 술자리가 있었지만 그는 절대로 이틀 연속 술자리를 가지지 않고 아이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집으로 들어가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내가 그 누구에게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아이 계획을 선배에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선배가 내가 봤던 사람들 중 남자, 여자 통틀어 가장 육아에 진심이었던 사람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선배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능력이 있어도 육아에는 진심일 수 있다는 것과 어쩌면 막연한 육아에서도 나의 주도성이 발휘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다만, 나는 승진을 하지 않고 아이를 가진다면 혹여나 내가 그 이후 직장생활에서 "실패"라는 것을 맛봤을 때 아이의 탓을 할까 봐 그 순간이 너무 두려웠다. 내가 아이를 가지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가정을 하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아이에게 미안했다. 승진을 하고 아이를 가진다면 그 핑계는 내 인생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생각들을 선배들에게 두서없이 토해내듯 풀어내었다. 어느덧 대구에서 서울로 오는 기차 안에서 단 한순간도 잠들지 않고 선배에게 나의 출산과 육아에 대한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난생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이토록 진지하게 커리어와 아이를 연관시킨 이야기들을 쏟아내 본 것이. 물론 세부적인 것들에 있어서는 실제 육아를 하는 지금 많은 것들이 달라지긴 했지만 큰 단위의 메시지는 변하지 않았다. 나는 커리어도, 육아에도 욕심이 가득하고 그 모든 걸 다 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내 이야기를 다 들어준 선배는 서울 부근에 오자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줘서 고맙다고 해줬다. 조금 건방진 후배인 나는 "에이, 선배한테 말하는 건데 당연하죠."라고 이야기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선배에게 "고맙습니다."라는 이야기를 먼저 했었어야 했는데...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너무 죄송하면서도 고맙다.)


기차에서 내리는 나의 발걸음은 조금은 가벼웠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나는 커리어와 출산의 방향을 정했으니 이제 이 것을 실천할 일만 남았으니까. 그날 남편에게도 "난 승진하고 아이를 가질게!"라고 당당히 말하며 하루를 마감했다.



그러나,

그리 당찼던 나는 승진하기 직전 해에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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